[김탁환 칼럼] 가로지르며 파종을 생각하다
김탁환 | 소설가
봄에 손 모내기를 했던 유치원생들이 추수체험을 하려고 다시 섬진강 들녘으로 왔다. 안전사고를 막기 위해 교사와 농부들이 미리 모여 회의를 했다. 낫으로 벼를 베고 홀태로 탈곡하고 키를 좌우로 흔들고 상하로 까불어 알곡과 쭉정이를 나눴다. 어린이들은 자신들이 심었던 모가 수백개 알곡이 달린 벼로 자라난 것을 직접 보고 만지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볍씨를 주워들고 봄이 오면 제일 먼저 와서 심겠다고 했다. 추수할 때 파종을 생각하는 어린이들이었다.
유치원생들을 보내고 나서, 나흘 내내 본격적인 추수를 했다. 내가 일한 곳은 농부과학자 이동현 박사가 벼 품종 연구를 위해 가꾼 논이다. 파종부터 탈곡까지 농기계를 전혀 쓰지 않아야, 100여개 품종이 각각 병충해에 얼마나 강하고 수확량은 얼마인지 비교하며 연구할 수 있다. 콤바인을 쓰면 반나절도 걸리지 않겠지만, 낫으로 벤 벼를 품종별로 탈곡해 저장하기까지 일일이 손을 바삐 놀리는 수밖에 없었다.
추수를 마치고 특강을 위해 경상남도 마산도서관으로 떠났다. 곡성에서 마산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가겠다고 하니, 지인들은 케이티엑스(KTX)로 오송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케이티엑스로 환승해 마산으로 내려가기를 권했다. 그러나 나는 섬진강을 따라 순천까지 가선, 거기서 마산으로 가는 경전선 무궁화호에 몸을 실었다. 수도권을 중심에 두고 지방을 세로로 오르내리는 방식에만 익숙한 이에겐 목포역에서 부산 부전역까지, 전라도와 경상도를 6시간40분 동안 가로지르는 기차가 낯설 것이다.
순천역은 보름 전에도 왔었다. 올해 시작한 ‘여순 10·19문학상’ 시상을 위해서였다. 응모작이 중·단편 소설 124편, 시 1280편에 이르렀다. 한편 한편 심사할 때마다 ‘한’(恨)이라는 단어가 짙게 묻어났다. 74년이나 말하지 못하고 가슴에 쌓아둔 응어리들이었다. 지난해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고, 올해는 정부 합동 추념식이 처음으로 열렸다. 문학상이 그날의 아픔을 세상으로 끌어내는 작은 디딤돌 역할을 했으면 싶다.
순천에서 출발한 기차는 광양과 진상을 지나 하동으로 들어섰다. 여기서부터는 경상도 땅이다. 섬진강 들녘에 살면서 새삼 깨달은 것이지만, 섬진강이 전라도와 경상도를 딱 가로지르지는 않는다. 하동군 위 구례군과 곡성군은 섬진강 왼편은 물론이고 오른편까지 넓게 자리잡았다.
하동, 횡천, 북천, 완사를 지나면 진주다. 진주역에선 시인 허수경이 2016년에 낸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가 거듭 떠오른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기차를 기다리다가 역에서 쓴 시들’이라는 ‘시인의 말’에 기대지 않더라도, 진주가 아닌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을 꿈꾸며 진주역에 앉아 있곤 했던 여고생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녀는 시와 함께 서울을 거쳐 독일 뮌스터까지 나아갔다가 거기서 영면했다. 그녀는 떠났지만 시는 다시 진주로 돌아왔다고나 할까.
마산도서관은 역에서 버스로 15분 정도 떨어진 용마산 자락에 있다. 중학생 시절 김춘수와 이선관의 시를 외우며 들락거렸던 곳이다. 곡성에서 마산까지 가로지른 역들을 강연의 마중물로 삼았다. 섬진강 들녘에 집필실을 낸 뒤 독자들을 만날 때마다 비슷한 질문을 받았다. 서울에서 고향인 통합 창원시로 내려오지 않고 곡성군으로 간 이유가 무엇이냐고. 가로지르기 위해서라면 답이 될까. 중앙인 서울과 변방인 고향을 오르내리지 않고, 팔도의 고을들을 가로지르며 다녀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2만7천명이 사는 곡성군에서, 4만3천명인 하동군을 거쳐, 34만명이 넘는 진주시를 통과해, 102만명이 사는 창원시를 오가면, 지방이 다 같은 지방이 아니고 마을이 다 같은 마을이 아니란 걸 깨닫는다. 그 폭이 목포에서 부전까지라면, 머물며 기억을 쌓고 앞날을 꿈꿀 고을이 더욱 다양하다.
강연을 마친 뒤 진해로 넘어와서 어머니와 늦은 저녁을 먹었다. 곡성 숙소 앞마당에서 딴 대봉감을 건넸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 창원에서 이맘때 땄던 감과 심었던 보리로 이어졌다. 기계공업단지가 들어서면서 마을 전체가 흙더미에 파묻혔고, 그 뒤론 실향민처럼 그곳을 그리워하며 지냈다. 코끼리처럼 늘어선 공장들을 보곤 돌아온 적도 있었다. 내 인생을 파종한 마을이 사라졌다며 아쉬워만 하지 말고, 가로지르며 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역에 내려보는 것은 어떨까. 추수하는 날 볍씨를 쥐고 봄을 기다리는 어린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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