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미안하다’ 김진태, 제대로 된 사과부터 했다면
[한겨레 프리즘][레고랜드발 시장 경색]
[전국 프리즘] 박수혁 | 충청강원데스크
“강원도는 강원중도개발공사가 비엔케이(BNK)투자증권에 빌린 2050억원을 대신 갚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중도개발공사에 대해 법원에 회생신청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강원도가 안고 있는 2050억원의 보증부담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번 회생신청의 목적입니다.”
지난 9월28일 강원도청 브리핑룸에 울려 퍼진 김진태 강원지사의 발언이다. ‘대신 갚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보증부담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는 말의 어감 때문일까? 김 지사 말 한마디의 파장은 실로 엄청났다. 결국 이 사건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금융권에 큰 혼란을 불러왔다.
하지만 김진태 지사는 “기업회생 신청과 채무불이행(디폴트)은 전혀 별개다. 강원도는 채무불이행을 선언한 적이 없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그렇다면 ‘채무불이행 선언’을 한 적이 없다는 그의 말은 사실일까? 그래서 기업회생 신청을 발표한 날인 9월28일부터 10월3일, 10월6일, 10월21일, 10월24일, 10월27일 등 김 지사의 공개 발언들을 꼼꼼하게 재확인해봤다. 결론적으로 ‘채무불이행’, ‘빚을 갚지 않겠다’ 같은 발언을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업회생 발표 당시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보증채무를 이행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회생신청 방침을 발표한 9월28일에도 김 지사는 기자회견문을 낭독한 뒤 “법적으로 보증계약을 맺었는데 그 법적인 의무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다. 지금 남아 있는 땅을 제값 받고 팔아서 이제라도 돈을 마련해서 그걸로 대출금을 갚게 하자는 것”이라며 취지를 설명했다. 또 금융권에서 논란이 일자 10월3일에도 보도자료를 내어 “회생신청은 보증채무를 회피하거나 채무를 줄이기 위한 목적이 아니다. 강원도는 계약에 따라 보증인으로 일체의 책임을 진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금융권의 시각은 달랐다. 금융권은 ‘대신 갚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보증부담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는 발언을 통해 김 지사가 대신 갚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고 받아들였다. 또 회생신청이 받아들여지면 채무동결 등이 이뤄져 채권자들이 약속했던 시기에 돈을 받지 못할 수 있어 사실상 채무불이행을 선언한 것이라는 주장도 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김 지사의 최근 발언을 보면 억울함이 잔뜩 묻어 있다. 김 지사는 10월24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번 일로 본의 아니게,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자금시장에 불필요한 혼란과 오해를 초래하게 해서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기업회생신청 발표 이후 26일 만에 처음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도 “회생신청과 채무불이행은 전혀 별개다. 채무불이행 선언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앞으로 잘못된 사실에 기반해 기사를 작성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언론을 탓했다. 지난 10월27일 베트남 출장에서 사흘 만에 돌아온 자리에선 “좀 미안하다. 어찌 됐든 전혀 본의가 아닌데도…. 이런 식으로 흘러오니까”라며 사과 아닌 사과를 해 오히려 비난을 받았다. 지금껏 제대로 된 사과가 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강원중도개발공사발 채무불이행 사태’가 발생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선언했든, 선언하지 않았든, 강원지사의 말은 ‘나비의 작은 날갯짓’ 이상의 위력을 발휘했다. 강원도정 책임자로서 기업회생신청이 불러온 금융위기라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만약 사태 초반, 대국민 사과 등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정한 사과부터 했으면 어땠을까? 실제 김 지사는 사과를 통해 정치생명 최대의 위기를 돌파한 적도 있다. 그는 지난 6월 지방선거 때 5·18민주화운동 폄훼 논란 등으로 공천 배제(컷오프)당했다가 사과 뒤 기사회생했고 결국 강원지사로 당선됐다. 국민은 ‘투사’가 아니라 진정한 사과 뒤 사태 수습에 최선을 다하는 ‘행정가’ 김진태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다. ‘비속어 사태’에 끝내 사과하지 않는 윤석열 대통령과 다른 길을 걷길 바란다.
p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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