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자’ 말고 ‘사망자’, 검은색 리본에는 ‘근조’ 빼고···“과도한 지침, 왜 이러나”[이태원 핼러윈 참사]

이성희·김원진·강현석 기자 2022. 11. 1.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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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수 국무총리(오른쪽)와 오세훈 서울시장이 지난 30일 오후 서울시청에서 용산구 이태원 핼러윈 인파 압사 사고와 관련한 상황 점검을 위해 상황실로 들어서고 있다. 한 총리는 근조 글씨 없는 검은색 리본을 달았지만 오 시장은 근조 글씨가 써 있는 검은색 리본을 달고 있다. |연합뉴스

이태원 핼러윈 참사 이후 행정안전부가 전국 지자체에 내린 공문으로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태원 사고 ‘희생자’를 ‘사망자’로 쓰라고 하고, 애도를 표하는 검은색 리본에는 근조(謹弔) 등과 같은 글자가 없는 것을 사용하라고 했다. 공무원들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자율성을 훼손하는 과도한 지침이다”며 의아해하고 있다.

1일 경향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행안부는 이태원 핼러윈 참사 다음날인 지난 30일 각 지자체에 회의 자료를 보냈다. 오는 5일까지인 ‘국가애도기간’의 지자체 협조사항을 담고 있다. 행안부는 회의 자료에선 분향소 명칭을 ‘이태원 사고 희생자 합동분향소’로 명기했다.

그러나 행안부는 이날 오후 늦게 보낸 공문을 통해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분향소’로 쓰라고 알렸다. 영정사진이나 위패는 생략하라는 지침도 내렸다. 당시 행안부 지침을 접한 한 지자체 관계자는 “세월호 참사 때에도 희생자라고 표기했는데 이번에는 희생자가 사망자로 바뀌는 것을 보면서 무슨 의도가 있는지 의아했다”고 말했다.

김성호 행정안전부 재난안전관리본부장은 이날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회의 브리핑에서 ‘희생자’가 ‘사망자’로 바뀐 경위를 묻는 질문에 “가해자나 책임 부분이 분명한 경우에는 희생자·피해자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사고 원인이) 객관적으로 명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중립적인 용어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해명했다.

검은색 리본도 도마에 올랐다. 행안부는 지난 30일 공문 이후 별도의 업무연락으로 각 지자체에 글자 없는 검은색 리본 착용을 지시했다. 해당 공문의 제목은 ‘이태원 사고 계기 공무원 기강확립 관련 국무총리 지시사항 추가안내’였다.

글자 없는 검은색 리본 지침으로 각 지자체마다 혼란을 겪었다. 전라남도 등은 기존에 사용하던 근조 리본을 준비했다가 급하게 검은색 리본을 새로 구매해 공무원들에게 나눠줬다. 전남도 한 공무원은 “기존에 보관하고 있던 근조가 쓰인 리본을 사용하려고 했는데 행안부 지침에 따라 급하게 글씨가 없는 검정 리본을 다시 마련했다”고 말했다.

근조 글씨가 쓰여있는 리본을 뒤집어 착용한 지자체도 있다. 서울시 한 공무원은 “그냥 검은 리본은 찾기도 어렵다”면서 “오전만 해도 근조 글씨가 있는 쪽으로 달고 있다가 지침이 그렇다기에 오후에 급히 뒤집어 달았다”고 말했다.

서울시가 이태원 핼러윈 참사와 관련해 각 자치구에 보낸 공문. 이 공문은 행안부에서 전달받은 내용으로, “글자 없는 검은색 리본을 착용해달라”고 적시돼 있다. |서울정보소통광장 캡쳐 화면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오세훈 서울시장이 유럽 출장에서 돌아온 지난달 30일 저녁 대책회의를 위해 서울시청에서 한덕수 국무총리와 만났을 당시 오 시장은 근조 글씨가 쓰여있는 검은 리본을, 한 총리는 근조 글씨가 없는 검은 리본을 각각 차고 있다.

이 지침은 인사혁신처가 만들어 행안부를 통해 전달한 것이다. 인사혁신처는 “검은색 리본 패용을 안내했는데 각 기관과 지자체 등의 문의가 많아 ‘글자 없는 검은색 리본’을 패용토록 설명한 바 있다”고만 했다가 논란이 일자 “애도를 표할 수 있는 검은색 리본이면 그 규격 등에 관계 없이 착용할 수 있다”며 입장을 바꿨다.

공무원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서울시의 다른 관계자는 “근조 리본을 달라고 하면 문의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글씨 없는 리본을 달라고 하면서 왜 그래야 하는지 문의가 계속됐다”면서 “동료들 사이에서는 이 정도는 지자체 재량으로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많았다”고 전했다.

문현철 숭실대 재난안전관리학과 교수는 “글씨 없는 검은색 리본 등 지나치게 구체적인 지침들은 현대와 같은 민주국가의 정서와 맞지 않다”며 “국민소득이 낮았던 개발 시대에는 어색하지 않을 수 있지만, 자칫 희생자를 추모하고 유가족을 위로하자는 애도기간의 좋은 취지를 퇴색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세월호 침몰 참사가 발생했던 2014년 전직 대통령 박근혜씨도 근조 한자가 적혀있는 추모 리본을 달았다. 2010년 천안함 희생장병 합동 분향소 설치 때도 전직 대통령 이명박씨 등은 일제히 근조 리본을 달았다.

여당인 국민의힘 의원들은 ‘이태원 사고 희생자 애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적힌 검은색 리본을 달았다. 민주당 지도부는 ‘추모’라고 적힌 검은색 리본을 달았다.

이성희 기자 mong2@kyunghyang.com, 김원진 기자 onejin@kyunghyang.com, 강현석 기자 kaj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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