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이 내 교실로 들어왔다
[[휴심정] 법인스님의 대숲바람]
근자에 어떤 사례를 보며 든 생각이다. 말이 힘을 얻지 못하면 내심의 뜻을 전달하지 못한다. 그러기에 말은 힘을 얻어야 설득이라는 목적을 이룰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말해야 ‘힘이 있는 말’이 될 수 있을까?
올해 봄부터 매월 한 번씩 열리고 있는 실상사와 서진암, 백장암 걷기 순례길에서 어느 초등학교 선생과 인연을 맺었다. 3암자 순례로 불리는 템플스테이는 걸으며 생각하고, 차를 나누며 삶과 지혜를 나누고, 농장에서 일하며 생명의 질서와 사랑을 체험한다. 선생은 인연이 맞았던지 매월 동참했다. 그리고 연휴에는 3일간 농장에서 자원봉사도 했다. 옆에서 가만 보니 일하는 형세가 제법이다. 농사 경험이 있느냐고 물으니 어머니가 하는 것만 봤다고 한다. 난생처음 호미 들고 잡초 뽑고, 모종을 심고, 비닐을 제거하고, 배추를 거둔다. 일하는 태세도 진지하다. 농장 사람들과 함께 하루 8시간 이상 꼬박 일했다. 진지하고 성실하다. 농장지기는 한몫 단단히 하는 일꾼이라며 칭찬했다.
그의 농장 경험은 초등학교 교실에서 빈 그릇 운동으로 이어졌다. 몇 번에 걸쳐 농장에서 일한 장면과 수확한 채소들을 사진으로 찍어 아이들과 공유했다. “선생님이 진짜 이렇게 온종일 일하셨어요?” “채소들이 이렇게 자라서 우리가 맛있게 먹는 거군요.” 아이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왜 아이들은 선생님 ‘말’에 ‘말’을 걸었을까? 말은 곧 생활로 이어졌다. 점심시간 음식이 많이 버려지는 것을 안타까워한 선생님은, 식판에 음식을 남기지 않기로 아이들과 얘기 나누고 함께 공부했다. “애들아, 선생님은 ‘음식 쓰레기’라는 말이 너무 이상하단다.” “맞아요, 선생님, 생각해 보니 소중한 음식에 쓰레기라는 말은 아닌 거 같아요.” 그래서 ‘음식 쓰레기’ 대신 ‘남는 음식’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마침내 음식의 명예가 회복된 것이다. 음식이 자존감을 찾은 것이다.
내친김에 학생들과 선생님은 식사 감사 기도문을 만들었다. “해, 구름, 바람, 비, 흙... 진짜 진짜 고마워. 정성 들여 길러주신 농부님들, 어부님들 고맙습니다. 음식을 만들어주신 급식실 선생님들 고맙습니다. 부모님 고맙습니다. 꼭꼭 씹어 맛있게 잘 먹겠습니다.”
며칠 후 선생님은 말끔히 비운 아이들 식판을 인증샷으로 찍어 실상사로 보내주었다. 나는 그 사진을 보면서 매우 흐뭇했다. 그리고 내내 생각했다. 말이 힘을 얻으려면 어찌해야 하는가를. 힘 있는 말의 무게와 길을 생각했다. 이제 사랑과 지혜가 넘치는 그 강부미선생님의 생생한 글을 소개한다.
■ 지리산이 내 교실로 들어왔다 ①
실상사 3암자 순례 템플스테이
천왕문에서 안을 들여다보니 거기, 한 세상이 환하다. 발뒤꿈치를 내디뎌 가만가만 걷는다. 떡고물 같고 콩가루 같은 흙을 밟으며, 8월의 뜨거운 적요 속으로 스며든다.
모두 제자리에 그대로 있다. 절 마당 가운데 잘생긴 석등이 반듯하게 서 있고, 좌우에 날씬한 삼층석탑이 대칭과 균형을 이룬다. 너른 경내 우측으로 종각과 명부전과 약사전이 거리를 두고 무심한 듯 자리해 있다.
“약사여래부처님, 안녕하셨어요?”
목탑지 초석들도 다정하게 한 걸음씩 떨어져 고요히 앉아있다. 석등 뒤편에 팔작지붕을 이고 있는 보광전은 단청 빛이 바랬지만 오히려 멋스럽다. 극락전과 칠성각과 요사채, 차례로 눈인사를 건넨다. 햇볕을 받아 뜨거워졌을 지붕 기와가 한 치 흐트러짐 없다. 어지럽던 마음 빗질하듯 가지런해지고 깊은숨이 쉬어진다. 나는 어떤 인연으로 지금, 여기에 있는가.
4월, ‘실상사 3암자 순례 템플스테이’
세상 사람들도 모두 나처럼 바쁠까? 새 학기가 시작하고 두 달, 해야 할 일이 몸과 마음을 짓누르고 있어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더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은 위기감에 큰 맘 먹고 4월 마지막 주말 3일을 뚝 떼어내 나에게 선물을 준다.
남원 산내면 실상사에 있는 것은 지리산과 나무로 지은 편안한 절집과 나물밥이 있고, 책으로만 만난 도법 스님과 법인 스님이 계시고, 아마도 향긋한 차도 마실 수 있으리라.
봄기운이 어린 산과 너른 들을 바라보며 호기롭게 출발을 했는데, 어느 사이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눈꺼풀이 감긴다. 몇 번이고 휴게소와 졸음 쉼터를 들러 쪽잠을 자고 정신을 차려 운전해서 도착한다.
종무소 앞에 마중 나와 계신 법인 스님을 뵌 그 순간부터 이전과는 다른 시간이 흐른다. 2박3일을 함께 지낼 휴휴당 식구들과 천왕문 앞에서 인사를 나누고, 스님을 따라 경내를 산책한다. 조화롭게 어우러진 한 세상을 돌아보는 작은 여행이다. 삼문, 금당, 탑, 범종각, 요사채, 숙소를 돌아보고, 극락전 뒤에 보물처럼 숨겨져 있는 수철화상탑과 증각대사탑을 느리게 감상한다. 보광전에서 절하는 예법도 배우고 약사전에 들어가 철조여래부처님도 뵌다. 검은 쇠로 만든 거대한 불상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다니 신기한 일이다. 법인 스님은 어려운 불교를 쉽게 알려주시는 마법이 있다. 논리정연한 비유가 귀에 쏙쏙 들어온다.
마침 부처님 오신 날 행사를 위해 절 마당에 색색의 연등을 달아놓았다. 빨강, 분홍, 노랑, 연두…, 그 선연한 빛깔의 연등이 유한한 생을 사는 중생의 이룰 수 없는 꿈을 매달아 놓은 것 같아 코끝이 찡해진다.
저녁 공양 시간, 세상에 절 밥이 이렇게나 맛있다니. 좋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소박한 진수성찬이다. 공양간에 걸린 식사 기도가 참 좋다. 천주교 신자인 나는 모든 것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템플스테이는 범종교 수행 프로그램이구나!’
둘째 날, ‘지리산 3암자 순례길’에 나선다. 스님들과 마을 활동가분들과 함께 걷는다. 고요한 숲길을 앞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다. ‘많은 사람이 걸으면, 그 발자국들이 모여 길이 되는구나.’ ‘도행지이성(道行之而成)’을 떠올린다. 백장암 가는 잔잔한 숲길에서 순례길의 느낌을 나에게 조용히 건넨다.
‘투명하고 야리야리한 연두 잎들아, 깊은 산속에서 혹독한 겨울을 어떻게 견디었느냐. 그리고 지금이 봄인 줄 어찌 알고 이렇게 보드라운 잎들을 내밀었느냐. 얼마나 애썼느냐. 나는 지리산에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는데, 서진암에서 그토록 아름다운 지리산 능선을 바라보았고, 숲길에서 손끝에 새 이파리의 보드라운 촉감을 만지면서 걸었구나. 고맙고, 고맙다.’
순례길은 특별한 걸음이다. 그냥 산행이 아니다. 법인 스님의 따뜻한 마음이 더해져 지리산을 통째 선물 받은 느낌이다. 아, 나는 지리산에 무엇을 주고 가야 하나. 내가 가진 것은 마음 한 자락뿐인데….
셋째 날, 농사일 수행이다. ‘왜 농사일이 수행이지? 템플스테이에 웬 농사일?’ 이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호미를 잡아보고, 풀도 처음 뽑는다. 그동안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내 삶은 무엇이었나. 한 무더기의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나의 실상사 템플스테이는 이렇게 시작된다.
5월, 다시 ‘실상사 3암자 순례 템플스테이’
5월 말, 나는 약사전 느티나무 아래 ‘돌 쉼터’에 하염없이 앉아있다.
‘잠깐, 생각 좀 해보자. 이렇게 바쁘게 사는 것, 괜찮은가? 혹시 말이야, 괜찮지 않으면 어떡하지?’ 느티나무가 단호하게 말해준다.
“아니! 안돼. 너에게도 네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야.”
저녁 공양 후 차담 시간, 법인 스님 말씀은 한없이 온화하고 부드러우나, 때로는 냉철한 직설이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뒤엉킨 것들을 간단명료하게 전해 주신다. 글에서 나온 말이 아닌, 삶에서 나온 성찰이기에 그 무게와 기품이 다르다. 스님 말씀은 세상을 살아가는 길을 비추는 등불이다. 선선한 저녁 바람에 마음은 서늘해지고 잠은 오지 않는다.
실상사에서는 매일 아침 사부대중 공동체가 함께 ‘아침을 여는 법석’을 연다. 종교가 다른 나는 약간의 걱정도 있었지만, 참여해보니 그 형식은 편안하고, 내용은 넓고 깊다. 한 식구처럼 둥그렇게 마주 앉아 절을 하고, 입정(入定) 의식을 한다. 침묵의 시간이 온전히 평화롭다. 한목소리로 읽는 법문의 내용은 더없이 심오하다. 이런 문화는 어떻게 자리 잡았을까? 아마도 진심을 다한 대화의 산물이리라.
둘째 날, ‘지리산 3암자 순례길’을 다시 걷는다. 올해는 지리산 둘레길 전체 스물한개 구간이 모두 개통된 지 십년이 되는 해라고 한다. ‘숲길’ 활동가님들이 전 구간에서 따로 또 같이 걷는다. 지리산을 지키는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우리는 ‘지구마을 평화 순례 소원문’을 함께 읽고 의미를 새기며 순례길에 오른다.
한 달 이상 계속되는 가뭄으로 지리산은 고통받고 있다. 나무들은 서로의 생명을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약한 나무들은 싱그러움을 잃고 안쓰럽게 말라간다. 마음이 아프다. 이제 내 눈에도 생명으로서의 자연이 들어온다. 타들어 가는 5월, 바싹 마른 지리산 숲길을 걸으며 내가 할 일은 무엇일까 생각한다.
학교에 돌아가면, 나는 아이들과 ‘기후 위기’라는 이 거대 담론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사구(死句)가 아닌 활구(活句)로…. 참 어렵다. 하지만 해야만 한다.
저녁 공양 후, ‘힘들었지만 참 좋았던’ 순례길 느낌을 나눈다. ‘실상사 약사여래 천일 기도문’ 중 마음에 드는 구절을 펜으로 쓰고(사경) 음미한다. 싱잉볼 소리와 함께 고요한 침묵의 세계로 들어간다. 침묵이 이런 것이구나.
셋째 날, 농사일 수행이다. 농부 덕산 스님의 온화한 미소는 한결같다. 땀 흘려 일하는 것이 최고의 수행임을 이제는 온몸으로 깨닫는다. 마늘종을 뽑고, 하우스에서 케일, 양상추, 쑥갓을 뜯어서 깨끗이 씻어 공동체 식구들 점심 공양에 올린다.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니, 마음이 오히려 한가로워진다.
혼자 경내 곳곳을 걸어본다. 스님들이 기거하는 방 댓돌 위에 하얀 고무신이 한 켤레씩 놓여 있다. 우리는 어울려 함께 가지만, 동시에 혼자인 것이다. 따로 또 같이.
* 강부미 선생님의 ’지리산이 내 교실로 들어왔다’는 2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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