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면]1989년 힐스버러가 말하듯, 우연한 참사는 없습니다

오광춘 기자 2022. 11. 1.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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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스버러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모를 순 있어도 '힐스버러 참사'는 한 번쯤 들어봤을 것입니다. 1989년 4월, 노팅엄 포레스트와 리버풀은 중립지역인 셰필드의 힐스버러 경기장에서 맞붙었습니다. 잉글랜드 모든 축구팀에 참가 자격이 열려있는 FA컵. 무엇보다 4강전이라 두 팀 모두 결승 진출을 꿈꾸고 있었죠. 그러나 경기 시작 5분 만에 모든 게 멈췄습니다. 관중석 한편에서 팬들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습니다. 3만 9000명 정도 들어가야 할 경기장에 5만 3000명 넘는 축구 팬들이 몰렸고, 그 사람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관중석 앞 철망이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엉킨 채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고 그 날 94명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사고 후유증으로 3명이 더 세상을 등져, 지금까지 희생자는 97명입니다. 당시 가장 어린 희생자는 10살 아이였습니다.

1989년 4월, 힐스버러 참사 다음날 경기장 골대엔 추모의 뜻이 담긴 꽃이 쌓였습니다. (사진=AP연합뉴스)
한동안 '힐스버러 참사'는 잉글랜드 축구의 훌리건을 상징하는 사고로 인식됐습니다. 축구장 폭력 이야기를 할 때 빠지지 않는 사례로 기록됐죠. 영국 경찰은 사고 다음 날 과격하고 술에 취한 축구 팬들이 일으킨 난동이 사고의 원인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경찰의 통제를 무시한 축구팬들의 일탈로 돌렸습니다. 당시 영국 내무부 장관 역시 “티켓이 없거나 가짜 티켓을 가진 (리버풀) 팬들이 경기장에 들어왔고, 경기장 스태프를 위협하기도 했다”는 입장을 냈습니다. 이게 사실인 줄 알았습니다.
97명의 희생자를 낳은 1989년 4월15일의 힐스버러 경기장, 경찰의 느슨한 통제가 부른 참사였습니다. (사진=AP연합뉴스)
이때부터 리버풀 팬들의 길고 긴 싸움이 시작됐습니다. 진실을 찾기 위한. 그리고 진상 규명을 하기까지 27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2016년 4월, 영국 법원은 경찰의 과실을 인정했습니다. 당시 경찰은 만원 관중이 들어찬 줄 알고도 축구팬들을 한꺼번에 입장시켜 참사를 유발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또한 구조차가 제대로 가동되지 않으면서 응급치료를 소홀히 해 더 많은 희생자를 낳게 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경찰과 당시 대처 정부가 책임을 축구팬들에게 돌리기 위해 증거와 진술을 일부 조작한 것도 확인됐습니다. 경찰의 통제를 무시한 일부 축구팬들의 잘못이 아니라 경찰의 통제가 부족했던 게 참사의 진실이었습니다.
4월만 되면 리버풀은 슬픈 봄을 맞이합니다. 희생자들을 기리는 리버풀 서포터스의 추모 행사가 이어집니다. (사진=EPA연합뉴스)

그렇다면 2022년 10월, 젊은 청춘들이 스러져간 이태원은 어떤가요. 1989년 거기는 축구를 즐기러 찾은 경기장이었고 2022년 여기는 축제를 즐기러 가는 거리였을 뿐, 다를 게 없습니다. 누구든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우리 주위의 시공간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계속 고통스런 질문을 던지게 만듭니다.
힐스버러가 말하듯, 세상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우연한 참사'는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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