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건웅의 풍수유람] 24. 찬란했고, 쓸쓸한 추사 선영
“추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 유홍준 선생의 말이다.
그가 펼쳤던 학예(學藝)의 경지는 “산같이 높고 바다같이 깊다(山崇海深)”고도 했다.
추사가 꽃피운 수 많은 학예 중, 필자는 어느 것 하나도 언급할 소양이 없다.
단지 풍객으로서 추사의 선영을 통하여 추사를 느끼고 싶었을 뿐이다.
1654년, 김홍욱은 8년 전에 사사(賜死)된 민회빈 강씨(愍懷嬪 姜氏)의 신원을 상소했으나, 효종의 노여움을 사서 곤장을 맞아 죽었다. 속칭 강옥(姜獄)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왕위의 종통(宗統)에 관련된 민감한 사안으로 조정에서는 언급이 금기시 되던 시절이었다.
김정희(金正喜) 선조들의 비문(碑文)에는 학주(鶴洲) 김홍욱(金弘郁)의 죽음을 반복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억울하게 죽은 선조에 대한 애통함과 선비로서 할 말은 했던 학주를 정신적 지주(支柱)로 존숭함이 느껴졌다.
@ 호란(胡亂)을 초래한 인조는 소현세자를 사지(死地)로 몰아넣더니, 며느리인 세자빈마저 폐위·사사(賜死)시킨다. 권력에 눈이 먼 패륜이었다.
추사 김정희 가문은 그의 10대조인 김연(金堧)이 서산 대교리, 속칭 ‘한다리’에 자리 한 이후 ‘한다리 김문(金門)’으로 통했다. 김홍욱의 억욱한 죽음은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추사 선조들의 선영은 어떤지 찾아간다.
추사 8대조 김적(金積, 1564~1646년)과 배위 화순최씨( ~ 1642년) 묘소. 서산시 대로리.
짙은 안개로 선명하지는 않지만 조안(朝案)은 수려하고 용호가 감싼 모습이다.
김적은 사마시에 합격하여 찰방(察訪)을 지냈다. 1594년, 임란(壬亂) 때에는 수천 석의 양곡을 풀어 사람들을 구휼했다. 김문(金門)은 이미 선대에 상당한 부(富)를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맥로는 묘소의 후고산인 옥녀봉을 타고 내려와서 김적 묘소 백호방에 8회절의 주혈을 맺으나, 배위 최씨의 묘소는 청색으로 표시한 길흉 경계선 밖에 자리하니 7회절 흉이다. 이 묘소가 훗날 아들의 참사(慘事)에 풍수적 요인으로 작동한다.
추사 7대조 김홍욱(金弘郁, 1602~1654년)과 배위 동복오씨 묘소. 부모 묘소 하단 청룡방.
김홍욱은 1635년 문과에 급제한 이후 비교적 순탄한 관로(官路)를 걸었다. 그런데 그가 황해도 관찰사로 재직 중이던 1654년에 가뭄이 들자 효종은 신하들의 의견을 듣는 구언(求言)을 명한다. 이 때 김홍욱은 사사된 강씨(姜氏)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이 국정쇄신에 도움이 될 것이란 상소를 올린다. 그러자 효종은 역정을 내며 김홍욱을 장살(杖殺)했다. 6년이 지난 후, 효종은 잘못을 깨닫고 학주를 복관(復官)을 시키고 문정(文貞)이란 시호(諡號)를 내린다. 그의 억울한 죽음은 효종의 오판(誤判)에 기인하지만 선비를 흉지에 모신 것도 한 몫했다는 생각이다.
맥로는 부모님 묘소와 달리 앞에서 진입하는데 김홍욱 묘소는 8회절, 배위 묘소는 7회절 명당이다.
추사 6대조 김세진(金世珍,1621~1686년)과 배위 전주이씨( ~ 1689년) 묘소. 서산시 유계리.
김세진은 부친의 원통한 죽음에 벼슬을 마다하며 은둔의 세월을 보낸다. 효종이 죽고 현종 10년에 조정의 공의(公議)에 따라 마지 못해 잠시 찰방 벼슬을 지낸다. 부인은 재물보다는 흩어진 시아버지 학주공의 서적을 수집하여 정리하는 군자다운 풍모를 보였다고 한다.
본인의 벼슬은 찰방직에 그쳤으나, 이 묘소의 풍수파워가 추사가문에 영예(榮譽)의 서막을 열어주었다. 13회절 대명당이니, 요즘 기준으로 국회의장이나 총리의 배출도 가능한 역량이다.
추사의 5대조 김두성(1643~1688년)과 배위 광주이씨(1643~1722년) 묘소. 부모 묘소의 청룡방.
김두성은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부친상(喪)을 당하자 슬픔이 지나쳐 지병이 생겼고 끝내는 부친의 여막에서 졸했다. 사후에 장남인 흥경의 벼슬이 높아지니 마침내는 영의정으로, 배위는 정경부인으로 추증된다. 모이자귀(母以子貴, 어머니는 아들의 현달로 귀하게 된다)라는 말이 있듯이 자식이 부모의 영예를 높인 경우이다.
묘소 뒤 서북방의 먼 곳에서 진입하는 맥로가, 묘역 뒤에서 분맥(分脈)하니 하나는 부모님 묘소에 주혈을 맺고 하나는 이곳에서 차혈을 맺으니 12회절 명당이다.
위성지도에 표시한 맥로도. 1.김세진과 2.김두성 묘소
양대 4분을 위와 같은 대명당에 모시니, 그 결실로 추사의 고조는 영의정에, 증조는 부마(駙馬)가 되는 등 후손들의 현달이 이어진다.
용궁리 백송. 1809년 추사가 부친 김노경을 따라 연경(燕京)에 갔을 때, 백송 종자를 가지고 와서 심은 것으로 전해진다.
추사 고조 김흥경(1677~1750년)과 배위 창원황씨 묘소. 용궁리 백송 뒤.(고조부터 추사까지 모두 용궁리에 모셨다)
1699년(숙종 25) 문과에 급제한 이후 검열·주서·정언·부교리·집의·승지·대사간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경종 때 한성부우윤으로 신임사화에 관련되어 파직되었다가, 1724년 영조의 즉위로 도승지가 된다. 이듬해에는 우참찬으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727년(영조3) 정미환국으로 한성부판윤에서 쫓겨났다가 이듬해 우참찬으로 복직되었으나,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에 반대하여 다시 파직되었다. 1730년 좌참찬에 복직되고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영의정에 이르러 기로소에 들어갔다.
그의 아들이 부마(駙馬)가 되어 월성위에 봉해지니 영조와는 사돈이 되었다.
전면에서 진입하는 맥로가 백송에서 크게 혈을 맺고, 김흥경의 묘소는 그 여기(餘氣)에 자리한 5회절 명당이다. 대명당은 아니지만 선대의 거듭된 대명당에 이런 명당이 더해지면 달리는 말에 채찍질하는 효과는 있다는 판단이다.
추사의 증조 김한신(1720~1758년)과 화순옹주(1720~1758년)묘소. 추사고택 청룡방.
묘비는 영조가 친필로 내려준 묘표(墓表)와 추사의 외가 쪽 어른인 유척기(兪拓基)가 비문을 썼다.
김한신은 김흥경의 넷째 아들로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졌다. 인물이 준수하고 총명하여 장인인 영조의 사랑을 받아 오위도총부 도총관 등의 높은 관직에 봉해졌다. 그러나 39세의 나이에 후사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부귀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비단옷 보다는 한미한 선비의 복장했으며, 출입시에도 초거보다는 말을 타고 다녔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으며, 늘 겸손했으니 그가 졸하자 모두가 “어진 도위가 죽었다”고 했다. (영조실록)
맥로는 하단에서 묘소를 거쳐 위로 올라가니 명당이 될 수 없는 곳이다.
월성위가 타계한 후, 그의 큰형 김한정의 3남 김이주가 출계하여 월성위를 이으니 그가 추사의 할아버지이다.
화순옹주 정려문.
조선왕조 400년 역사에 처음 나온 왕실 열녀였다. 옹주의 정려각은 조카인 정조가 내려준 것이다. 영조는 딸의 죽음을 애통하게 여겼지만 애비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괘씸하게 생각하여 정려를 내리지 않았다.
궁중에서의 외로운 성장, 금슬은 좋았지만 후사도 없이 갑자기 떠나간 남편, 옹주는 삶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추사의 친증조 김한정(1703~1764년)과 배위 반남박씨(1704~1758년) 묘소.
김한정은 4남을 두었는데, 3남인 김이주가 동생인 김한신의 양자로 출계했다. 김한정은 연안부사를 역임했고, 훗날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맥로는 하단의 김태주(추사 큰할아버지)묘소 아래로부터 출발하여 두 묘소 위로 지나가니 묘소는 모두 맥로에 걸린 흉지이다. 이 묘소가 추사가문의 가화(家禍)를 초래한다.
추사의 조부 김이주(1730~1797년)와 배위 해평윤씨(1729~1796년) 묘소.
김이주는 어려서부터 병약했고 33세가 되어 생원이 되었다. 벼슬은 이조참판·대성·도헌·이참·형판·유수 등을 역임했다. 정조 때에는 도승지까지 올랐으나 병으로 여러 번 사임한다. 환갑 때에는 정조가 장악원 악사까지 보냈고, 그의 집에 들러 병세와 근황을 물어볼 정도로 왕실의 총애를 받았다.
그림과 같이 맥로가 묘소를 지나가니, 멈추어 혈을 맺지 못한 곳이다.
원래부터 김이주를 이곳에 모셨다면 추사 가문의 불운(不運)에 설상가상(雪上加霜)의 작용을 했을 것이다. 김이주는 4명의 아들을 두었으니 장자(長子)는 김노영(金魯永)이고 막내는 김노경(金魯敬)이다. 김노영이 아들이 없자 김노경의 장남인 김정희가 8살 무렵 양자로 월성위의 대를 잇게한다. 그러나 추사가 열두 살 때에 양아버지가 별세하니, 어린 추사가 월성위 집안의 주손(胄孫)으로 큰 가문을 맡게 되었다.(추사 11세에 조모 해평윤씨가 사망하고 12세 때에는 양부와 조부가 사망한다) 어려서부터 애늙은이 같다는 추사의 진중함은 이런 가족사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추사 부친 김노경(1766~1837년)과 모친 기계유씨(1766~1801년) 묘소.
원래는 과천 청계산 옥녀봉 아래에 모셨다가 1968년 지금의 장소(부친 김이주의 청룡방)로 옮겨온 것이다.
김노경은 늦은 나이인 40세에 대과에 합격했지만 장기간 요직을 역임한다.
그가 호조참판으로 동지부사로 연경에 갈 때, 추사는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따라갔다. 이후 그는 예조참판·비변사 제조·경상감사·예문관 제학 등을 거쳐 추사가 과거에 급제할 무렵에는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그리고 다시 홍문관 제학·이조판서·대사헌·형조판서·예문관 제학 등을 역임했고 동지정사로 한 번 더 연경에 다녀왔다.
귀국 후 회갑을 맞은 김노경은 공조판서·형조판서·대사헌·예조판서·병조판서·판의금부사·평양감사에 이르기까지 무려 20년간 요직 중의 요직만 지냈다. 왕실의 비호가 아니면 받기 힘든 특혜였다. 이러한 것이 한편으로는 안동김씨의 극심한 견제를 받아 말년에는 수난을 당하기도 한다.
추사의 어머니는 남편과 자식에게 정성과 애정을 다했던 전형적인 조선 여인이었다.
그가 남긴 궁서체의 한글서예도 일품이다. 필획에 힘과 울림이 있고, 단아한 기품을 느낄 수 있다고 하니 말이다. 그래서 기계 유씨들은 반은 농으로 추사가 ‘외탁’한 덕에 글씨를 잘 썼다고 말하곤 한다.
사진의 앞(상)은 부모님 뒤(하)는 동생 김명희(1788~1856) 묘소.
김명희는 부친과 형이 연이어 유배되는 가화(家禍)에 시달리며 대과에 급제하지 못하여 벼슬은 교관(敎官)에 그쳤지만 그도 시와 글씨에 뛰어났다.
그 또한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연경(燕京)에 가서 청나라의 많은 인사들과 교류하였으니, 청의 오숭량(吳嵩梁)은 김노경·김정희·김명희를 소동파 3부자에 비견했다.
김명희가 1856년 4월에 중병을 앓다 세상을 떠나니, 추사가 별세하기 6개월 전의 일이었다.
완당선생 경주김공 정희묘(玩堂先生慶州金公諱正喜墓).
1937년 과천에서 이장해 모신 것으로 초배(初配)인 한산이씨와 계배(繼配)인 예안이씨 세 분을 함께 모셨다. 묘소는 청룡방 주혈의 여기(餘氣)에 모신 2회절의 소지소혈이다.
‘철종실록’에는 추사의 삶을 평가하는 ‘졸기(卒記)’가 다음과 같이 실려있다.
전 참판 김정희가 졸하였다. 김정희는 이조판서 김노경의 아들로 총명하고 기억력이 투철하여 여러 가지 책을 널리 읽었으며, 금석문과 그림과 역사에 깊이 통달했고, 초서·해서·전서·예서에서 참다운 경지를 신기하게 깨달았다. 때로는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잘했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비판할 수 없었으며, 그의 작은 아우 김명희와 더불어 훈지처럼 서로 화답하고 울연히 당대의 대가가 되었다.
젊어서부터 영특한 이름을 드날렸으나 중도에 가화를 만나 남쪽으로 귀양가고 북쪽으로 유배가며 온갖 풍상을 다 겪고, 혹은 세상의 쓰임을 다하고 혹은 세상의 버림을 받으며 나아가기도 하고 또는 물러나기도 했으나 세상에선 (그를) 송나라의 소동파에 견주기도 하였다.
@ 훈지: 형제간의 화목함을 말함.
묘소 앞의 두 줄기의 다솔복이 옛날을 간신히 지키고 있지만 30년 전만 해도 열두 줄기가 넉넉하게 뻗은 모습이었다고 한다.
추사 사후 경주김씨 월성위 집안은 몰락해 간다. 그 쓸쓸한 과정을 홍한주는 ‘지수염필’에 이렇게 말했다.
추사는 향년 71세로 과천에서 세상을 떠났다. 작은 동생 김명희는 그보다 몇 달 전에 향년 70세로 죽었고, 막냇동생 김상희는 올봄(1863)에 68세로 죽었는데, 모두 아들이 없어 그 대를 잇지 못했으며 문장 또한 뒤가 끊어졌으니 슬픈 일이다.
김정희는 추사체(秋史體)라는 세상에 둘도 없는 최고의 글씨를 남겼다.
세한도(歲寒圖)로 대표되는 그림과 시(詩)와 산문에 이르기까지 학자이자 예술가로서 19세기 조선왕조의 문명을 화려하게 꽃피운 위대한 위인이었다. 완당 김정희 묘소에 큰 절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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