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블라인드 채용’ 폐지 당연하다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文정부 채용비리 근절 명분 도입
지원자 직무능력·자격 확인 불가
원자력硏에 외국 국적자 뽑기도
학력이란 자산마저 포기하게 해
자기소개서를 ‘自小說’로 비하
행정규제에 개인 노력 차이 실종
입사 지원자의 출신지·가족관계·학력·외모 등의 자료를 배제한 ‘블라인드 채용’이 사라진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5개월 만에 처음 듣는 반가운 소식이다. 사실, 공공기관의 자율성과 지원자의 역량과 노력을 인정하지 않는 블라인드 채용은 이미 실패한 정책이다. 유능한 지원자 선발을 어렵게 했고, 지원자의 능력에 대한 정당한 평가도 불가능해졌다. 블라인드 채용의 폐지를 과학기술 분야의 출연 연구기관에만 한정할 일이 아니다. 실패가 확인된 제도의 퇴출을 머뭇거리거나 주저할 이유가 없다.
블라인드 채용은 문재인 정부가 출범 1개월 만인 2017년 6월에 ‘평등한 기회, 공정한 과정’을 명분으로 밀어붙인 졸속 정책이었다. 공공기관의 채용 비리 해결이 시급하고 절박한 사회적 과제였다. 그러나 채용의 공정을 위한 블라인드 채용은 당시 청와대의 일방적인 억지일 뿐이었다. 그 정당성을 입증하는 어떠한 논리적 근거도 제시하지 못했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제도인지를 검증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도 없었다.
현실은 냉혹했다. 공공기관으로서는 지원자의 직무 역량은커녕 간단한 지원 자격을 확인하는 일조차 불가능했다. 심지어 지원자의 국적도 확인할 수 없어, 국가 보안시설을 관리해야 하는 한국원자력연구원이 중국 국적자를 선발하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졌다. 자기소개서에만 의존한 채용은 겉으론 화려했지만, 실은 무작위로 지원자를 가려내는 도박판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과거 경력으로부터 지원자의 창조적 역량을 평가해야 하는 과학기술 분야 출연연의 경우 문제가 더 심각했다.
지원자로서도 난처했다. 실무 스펙을 갖추지 못한 채 치열한 취업 경쟁에 뛰어들어야 하는 새내기 지원자들에게 ‘학력’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자산이고 무기다. 취업을 위해 애써 쌓아 놓은 학력이라는 자산을 포기하고, 알량한 ‘자기소개서’ 한 장에 평생을 걸어야 한다는 요구는 공정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아무도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검증·확인할 수 없는 자기소개서가 취업을 앞둔 젊은이들에게 ‘자소설(自小說)’로 비하·폄훼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인터넷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자소설 닷컴’들이 블라인드 채용의 웃지 못할 난맥상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다.
지원자들이 제출하는 자기소개서에 대한 공정하고 객관적인 평가만 어려운 것이 아니다. 면접관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존하는 면접 평가는 훨씬 더 어렵다. 경험이 풍부한 면접관이라고 사정이 다른 것도 아니다. 낯선 지원자의 직무 역량과 인성을 확실하게 평가할 수 있다는 면접관의 허풍은 일방적인 궤변일 뿐이다. 면접관의 수를 늘리고, 평가 지표와 방식을 촘촘하게 마련한다고 사정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결국, 블라인드 채용을 거부할 수 없는 공공기관은 적성과 전공 분야의 필기시험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필기시험이 지원자의 직무 능력을 정확히 평가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공공기관의 필기시험을 노린 사교육 시장의 배만 불려 주는 게 안타까운 현실이다.
블라인드 채용의 실패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지나치게 경직된 행정 규제에서 개인의 역량과 노력의 차이가 실종돼 버렸기 때문이다. 학력이 지원자의 노력 결과가 아니라, 평가자의 편견을 개입시키는 단초로 왜곡돼 버린 것은 심각한 부작용이다.
지원자의 직무 역량을 정확하게 평가해서 공정하게 채용하는 일이 공공기관의 막중한 사회적 책무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채용의 기회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원칙이나 평가와 채용의 과정에서 편견이나 이권의 개입을 절대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도 명백하다. 그러나 지원자의 직무 역량을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일이 쉽지 않은 현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공정 채용을 위한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지원자의 전문성 평가에 대한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 평가의 가치를 상실해 버린 ‘자기소개서’와 ‘전문가 추천서’를 제대로 활용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공공기관의 자율적 노력을 통해 투명성과 책무성을 강화하도록 해 주는 게 유일 대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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