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 공포’ ‘빚 공포’ 사이에서 한국은행 곤혹스럽게 균형 잡는 중
● 왜 유독 원화 가치만 크게 떨어지는가
● 대외 충격에 취약한 외환시장은 낙후된 외환 시스템 때문
● 1분기 한국 가계 빚, GDP 대비 105% 초과… 세계 최고 수준
● 높은 해외의존도에서 비롯한 한국 경제 비관론
● 인구학적 변화는 한국 경제가 당면한 중장기 위험
● 이념·원칙 숭고해도 문제해결 능력 없으면 말짱 꽝
단기간 환율 급등 이유
그러나 9월 국채 수익률은 반대로 급등했다. 미국 국채 가격이 급락하는 것은 국채 수익률이 앞으로 더 오를 것이라는 예상에서 국채를 팔아치우기 때문이다. 불황의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인플레이션을 잡겠다는 연방준비제도(연준)의 긴축 통화정책 기조가 배경이 되고 있다. 즉 물가안정에 대한 연준의 강력한 의지가 국채 시장의 불안을 초래한 것이다.
국채 수익률 폭등은 국채 시장의 유동성 부족으로, 다시 유동성 부족은 미국 국채를 기반으로 하는 단기 달러화 신용 시장 위축으로 전 세계에 파급되고 있다.
베이시스 스와프(Basis swap)는 흔히 국내 외환시장에서 달러화 유동성 정도를 측정하는 지표로 사용된다. 베이시스 스와프는 외국인이 국내로 달러화를 들여와 무위험 차익거래 활동을 통해 버는 연(年)수익률이다. 무위험 차익거래는 환위험을 제어할 뿐 유동성위험은 통제할 수 없다. 외환시장이 안정적일 때 베이시스 스와프는 0.5% 남짓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5%가 넘었고, 코로나19 팬데믹 초기 연준과 통화스와프 직전 2.5%에 접근했으며 최근 1.5%를 넘겼다. 외화 유동성은 이제 더는 무시할 수 없게 됐다.
폭등하는 원-달러 환율에서 떠오르는 또 다른 의문은 왜 유독 원화 가치만 크게 떨어지는 것인지다. 어쩌면 우리나라가 팬데믹과의 전쟁으로 가장 큰 부수적(附隨的) 피해를 본 나라일지 모른다. 팬데믹 직전이던 2020년 1월 초 당시와 비교하면 엔화, 위안화, 유로화, 파운드화 등 주요 통화 가운데 달러화 대비 원화 가치는 엔화 다음으로 하락 폭이 크다. 일본과 중국의 통화 당국이 완화적 통화정책을 수행하는 것을 감안하면 이토록 원화 가치가 폭락한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유사한 사례는 달러 대비 유로화보다 원화가 훨씬 더 큰 폭으로 떨어진 2010년대 초 남유럽 재정위기 당시에도 있었다. 부수적 피해는 경제규모에 비해 낙후된 외환 시스템 때문이다. 말미에 설명하기로 한다.
미래 환율에 영향 끼치는 요인
비관론은 해외의존도가 높은 경제구조에서 비롯한다. 2020년 GDP 대비 수출과 수입은 69%에 달한다. 같은 해 주요국 가운데 미국(23%), 일본(31%), 중국(35%) 등은 대부분 우리보다 낮다. 연준의 공격적인 긴축통화 정책에 따른 글로벌 경제 침체 가능성이 원화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다는 의미다. 더욱이 수출시장에서 경쟁하는 통화인 엔화와 위안화 가치 하락은 원화를 끌어내리는 또 다른 요인이다.
일반적으로 경제가 성숙함에 따라 해외 부문의 비중은 감소한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해외 비중이 여전히 높은 것은 소비 비중이 낮아지는 추세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나라 GDP 대비 가계 및 가계에 봉사하는 비영리단체 소비지출은 2002년 56% 정점에서 2014년 50% 미만으로 떨어진 후 2021년 46%로 하락했다. 이러한 현상은 소비가 안정적인 미국(70%), 일본(55%) 등 다른 선진국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성장 동력으로서 소비의 역할이 갈수록 위축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소비 비중이 낮아지는 추세는 늘어나는 가계부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2002년 LG카드 사태를 계기로 가계부채(GDP 대비 60%)는 한국 경제를 논할 때 뺄 수 없는 존재가 됐다. 국제결제은행에 따르면 2022년 1분기 우리나라 가계 빚은 GDP 대비 105%를 초과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일본(69%), 중국(61%), 미국(77%)보다 월등히 높다.
금융이 발전하면 소비자 금융이 활성화돼 내수를 촉진하고 성장에 기여한다. 가계부채와 경제성장의 관계를 규명한 국제통화기금(IMF) 자료에 따르면 가계부채가 경제성장에 기여하는 임계 구간은 GDP 대비 35~70% 수준이다. 가계 빚이 임계 구간을 넘어서면 부채 상환 압력이 높아져 성장을 촉진하는 효과는 반감되며 궁극적으로 성장을 끌어내리는 부채 오버행(Overhang)이 일어난다.
가계부채와 집값이 경제활동에 미치는 파급효과를 분석한 IMF의 또 다른 연구는 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중이 높을 때 집값 하락은 단순히 집값만 하락한 경우보다 소비를 4배 위축하게 하며 성장과 실업에 미치는 부정적인 파급효과가 최소 5년이 지속된다고 보고했다.
방대한 국가 패널 자료를 기반으로 한 IMF의 실증분석은 빚이 많은 경제에서 자산 가격 하락이 침체를 가져온다는 어빙 피셔(Irving Fisher)의 부채 디플레이션 가설을 데이터를 통해 확인한 것이다.
주택담보대출은 우리나라 가계 빚의 가장 큰 몫을 차지한다. 예금은행 가계대출의 70%에 달한다. 우리나라는 소구권(부채상환권)을 주택담보대출을 공급하는 금융회사가 소유하고 있다. 은행의 소구권이 없는 나라와 달리 사람들이 집값이 떨어졌다고 해서 빚을 못 갚겠다고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소구권이 금융회사에 있을 때 빚은 대출을 공급한 금융회사가 아닌 소비지출에 그 위험이 집중된다. 빚진 사람들은 우선 빚부터 갚아야 하기 때문이다. '2021년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가구의 64%가 부채를 보유하고 있다. 부채 디플레이션의 잠재적 위험을 제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과다한 빚은 거시경제의 탄력성(Resilience)을 떨어뜨린다. 연준이 올해 3월부터 6개월 동안 정책금리를 3%, 한은은 13개월에 걸쳐 1.75%를 인상한 차이다. 뉴질랜드는 5번 연속 0.5%를 인상했다. 연준이 긴축 통화정책기조를 버리지 않는 한 한은은 매우 곤혹스러운 처지에 처할 수밖에 없다. 환율의 공포와 빚의 공포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인구학적 변화는 중장기 위험
과다한 부채가 내수를 위축하는 부채 오버행이 한국 경제의 단기·중기적 위험이라면 저출산에 따른 급격한 인구학적 변화는 한국 경제가 당면한 중장기 위험이다. 2021년 통계청의 장래인구기본추계에 따르면 15~64세의 생산가능인구는 2019년 3760만 명을 정점으로 2042년 1000만 명 이상이 줄어들고 2069년 또다시 1000만 명 이상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은 선진국 가운데 노령화가 가장 늦게 시작됐지만 그 속도는 역사상 가장 빨랐다, 한국이 등장할 때까지는.급격한 인구구조 변화는 필연적으로 복지 및 연금제도의 지속가능성 문제를 야기한다. 그리고 세대 간 형평성 문제를 일으킨다. 건강보험, 국민연금, 고용보험, 산재보험 등 사회보험은 질병, 노령, 실업, 상해와 같은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중요한 사회안전망이다. 이 보험기금이 고갈돼 보험료가 오르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난다. 사회보험은 낸 보험료가 자신의 몫으로 적립되는 적립식과 보험료를 내는 사람의 보험료가 보험의 혜택을 받는 사람의 보험금 재원으로 쓰이는 부과식이 결합돼 운영된다.
기금이 고갈되는 것은 낸 보험료보다 보험금이 더 많이 지출됐기 때문인데 부과식으로 인해 두 가지 형태의 재분배가 일어난 결과다. 하나는 보험료를 낸 사람으로부터 보험금을 타간 사람으로 일어난 재분배다. 다른 하나는 세대 간 재분배다. 기금이 고갈된 것은 낸 보험료에 비해 보험의 혜택이 지나치게 컸기 때문이다.
인구구조 변화는 저(低)연령층에서 고(高)연령층으로 세대 간 재분배를 동반한다. 노령인구 대비 생산가능인구의 감소로 인해 노년부양비가 증가할 때 부과 방식이 결합된 사회보험은 보험료 수입보다 지출을 더 증가하게 함으로써 적자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구조적 문제를 일으켜 보험기금은 바닥난다.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급격한 인구구조 변화가 세대 간 재분배에 어떤 함의를 가질지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다.
여기서 정부가 국채 발행을 통해 기금을 조달하는 대안을 생각해 볼 수 있으나 정부도 빚을 지는 데 한계가 있다. 따라서 그 빚의 상당 부분은 세금을 거두어 상환해야 한다. 이때 정부 빚에 투자하는 고(高)연령층 세대는 세금 납부로 그 원리금과 이자를 상환해야 하는 저(低)연령층 세대로부터 이전받게 돼 또다시 세대 간 재분배는 피할 수 없게 된다.
세대 간 재분배, 즉 노년인구가 얼마나 생산가능인구의 부담으로 작용할 것인지는 노년층이 얼마나 부를 축적하고 있는지에 의존하게 되는데 노인빈곤율 지표를 통해 가늠할 수 있다. 2015년 65세 이상 상대 빈곤율은 우리나라가 44.3%로 38개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다. 65세 이상 연령대의 약 45%가 전체 인구를 기준으로 측정한 가처분소득의 중간값 이하로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같은 해 미국은 20.9%, 일본은 19.6%에 불과하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21 자살예방백서'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우리나라의 인구 10만 명당 65세 이상 노인 자살률은 46.6명으로 OECD 평균(17.2명)의 세 배 가까울 정도로 가장 높다. 여기서 경제적 어려움이 높은 자살률의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실제로 2018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노인실태조사'는 자살을 생각하는 이유 가운데 경제적 어려움이 가장 큰 것으로 조사됐다.
우리나라의 높은 노인빈곤율이 개선되지 않고 대물림된다면 앞으로 그 수가 계속 줄어들 청장년세대의 부담은 갈수록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급격한 인구구조 변화하에서 노인 빈곤은 악순환을 일으키는 핵심 고리다. 노인 빈곤은 어제오늘 일어난 우연하고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만약 노인 빈곤을 해소하지 못한다면 비록 지속 가능한 제도가 도입된다고 하더라도 고려장 설화처럼 결국 모든 세대가 반복해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
국제관계에서 레버리지 결정하는 핵심 요인
경제안보(Economic security)는 포스트 팬데믹·전쟁 시대의 키워드다. 경제안보는 국가경제 이익을 위협하거나 방해할 수 있는 사건, 상황의 전개 또는 행동에 직면해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고 유리한 방향으로 경제 여건을 조성하는 능력을 말한다. 요컨대 지속 가능한 번영과 성장에 장애가 되는 위험 요인을 찾아서 제어하는 역량을 말한다. 더 안정적이고 더 확실하고 손실이 덜한 미래의 번영과 성장을 위해서 오늘의 번영과 성장은 희생될 수 있다는 것이 경제안보의 논리다.당초 경제안보는 군사적 위협이 줄어든 포스트 냉전시대에 군사안보를 대체하는 개념으로 부각됐다. 20세기 말 완성된 글로벌경제의 통합이 21세기에 들어와 균열이 일어나면서 다시 관심을 받고 있다. 균열이 지정학적 위험을 높이고, 높아진 지정학적 위험은 그만큼 국제관계의 중요성을 드높인다. 이때 국제관계에서 레버리지를 결정하는 핵심 요인은 나라의 경제력이며 경제안보 역량과 직결된다.
글로벌경제의 균열은 코로나19 팬데믹과 같은 의도치 않은 재난이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오판에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은 다양한 사건의 연속에 의해 확대되고 있지만 그 조짐은 이미 21세기와 더불어 시작됐다.
2020년 3월 '문명의 충돌'의 저자 새뮤얼 헌팅턴이 창립한 국제관계 전문잡지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는 저명 국제정치·경제 전문가들의 포스트 펜데믹 세계에 대한 전망을 소개한 적이 있다.
탈세계화와 같은 비관론이 팽배한 가운데 외교협회(CFR) 리처드 하스 회장은 더 많은 나라가 실패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대부분 나라 정부가 내부지향적 행태를 보이게 됨에 따라 국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부족해져 위기에서 회복하는 데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실제로 IMF는 2022년 3월 현재 90개국에 대해 1700억 달러 남짓 금융지원을 하고 있다. 156개 신흥 개도국 가운데 순외채를 진 나라가 121개국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소득이 낮은 채무국이 얼마나 어려움에 처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빚진 돈 없는 나라에 재앙을 안겨주었다면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전 세계를 막다른 곳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사학자 니얼 퍼거슨은 현 상황을 팬데믹 후 전쟁이라는 순서의 차이가 있지만 제1차 세계대전에 비유했다. 그는 제3차 대전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팬데믹 당시 중앙은행과 정부가 푼 막대한 재난지원금, 공급사슬의 훼손과 전쟁이 초래한 에너지 등 국제 상품 가격 폭등이 동반하는 스태그플레이션 등 현재 글로벌경제가 당면한 모든 악재는 결국 언젠가 해소된다.
중요한 것은 이 전쟁의 글로벌경제 나아가 우리 경제에 대한 함의다. 20세기 말 냉전체제가 무너지면서 구(舊)공산권에 있던 체제전환국들이 글로벌경제에 편입됐으며 아시아 금융위기를 계기로 글로벌경제의 통합이 완성됐다. 세계 여러 나라는 무역과 금융으로 긴밀히 연계돼 어느 때보다 상호의존적이 됐다. 많은 경제전문가는 높은 상호의존성이 나라 간 갈등을 완화할 것으로 믿었다.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도 미국 주도의 국제규범에 따른 자유주의 질서 안에서 중국이 시장경제로 전환하기를 기대했던 것에 그 배경이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그것이 허구였음을 드러냈고, 사람들은 도널드 트럼프 정부 당시 표면화된 미·중 갈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당초 기대와 달리 마치 트로이 목마처럼 중국은 이 질서 안에 들어와 국가자본주의를 구축해 확장하고 미국에 버금가는 거대 국가로 발돋움했다. 이것이 미국의 시각이다.
우리가 알던 미국은 돌아오지 않았다
중국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의 손을 들어주자 마스크 쓰기에서 낙태에 이르기까지 어떤 것도 컨센서스를 이루지 못했던 미국은 정파를 초월해 대(對)중국 정책에 모처럼 하나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들끼리 기술과 공급망을 공유하는 프렌드 쇼어링(Friend shoring)이 화두가 됐다.
2017년 트럼프 정부가 발표한 '국가안보전략보고서'는 미국이 정치·경제·군사 등 국력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통합해 미국이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것이라는 의지를 피력했다. 경제와 국가안보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대목이다.
4년 뒤인 2021년 6월 조 바이든 정부가 발표한 '공급망100일 검토보고서'는 핵심 산업의 공급망 실태와 핵심 산업의 혁신을 유도하기 위한 정부의 산업정책을 제시했다. 산업정책에 대한 불신이 강한 전통을 가진 미국이 특이하게도 최우선 과제로 삼은 것이다.
그런데 앞의 보고서에 미국 우선주의를 삭제하고 뒤의 보고서에 미국 우선주의를 추가하면 두 보고서는 마치 하나의 주체가 안보와 경제를 주제로 연속 시리즈로 집필한 것처럼 보인다. 지난여름 워싱턴에 만난 한 인사는 두 보고서가 향후 미국의 대외정책 기조를 제시하고 있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현직 대통령 트럼프를 패배시킨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이 돌아왔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감축법안에서 보듯이 우리가 알던 미국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뉴 리퍼블릭(New Republic)'을 창간한 월터 리프먼은 한 나라의 대외정책은 그 나라의 대외적 약속과 내부 힘의 균형에서 나온다고 주장했다. 힘이 약속에 미치지 못할 때 그 나라의 대외정책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헌팅턴은 이 불균형을 리프먼 갭이라고 조어했다.
미국을 벗겨 먹는다고 동맹을 비난했던 트럼프 전 대통령의 행태를 돌이켜 생각하면 미국이 세계질서 수호자로서 패권국의 위치에서 물러나 오로지 국익의 관점에서 대외정책을 펴는 자국 우선주의나 현실주의를 추구하기보다는 리프먼 갭에 빠졌다는 가설을 생각할 수 있다. 국력이 상대적으로 하락하고 어떤 이슈에 대해서도 합의를 도출할 수 없는 가운데 미국이 자유주의 질서와 동맹에 대한 약속을 지키기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전략적으로 미국이 중시하는 아시아 지역에 대한 경제안보 플랫폼 IPEF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에 미국 시장 접근은 없다. 우리의 경제적 이해와 깊은 관련 있는 CHIP4 동맹, 반도체와 과학법, 인플레이션감축법의 요지는 중국을 배제한 공급망을 구축하고 온쇼어링을 유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미국 제조업의 경쟁력과 고용이라는 목표변수가 있다. 리프먼 갭을 다시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한국 경제는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규범에 따른 자유주의 질서하에서 성장과 번영을 이뤄냈다. 그러나 패권국의 위상이 약화되고 중국이 거대 국가로 등장하면서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위험은 고조되고 있다. 이제 지정학적 위험을 제어해 지속적 번영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큰 도전이 됐다. 여기에 경제안보의 당위성이 있다.
우리 경제는 대외 충격에 유난히 취약한 양상을 보인다. 앞에서 필자는 대외 충격에 취약한 외환시장과 과다한 가계부채가 경제의 탄력성을 훼손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대외충격에 취약한 외환시장은 경제규모에 비해 낙후된 외환 시스템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혹자는 외환보유액(2022년 8월 4360억 달러)이 부족한 탓이라고 주장한다. 우리와 비슷한 경제규모를 가진 호주의 외환보유액은 560억 달러에 불과하다. 혹자는 대외수지를 탓하기도 한다. 호주는 2001~2021년 기간 GDP 대비 연평균 –3.3%의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동안 우리나라는 연평균 3.2% 흑자를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주의 국가신용도는 세계 최상이다.
낙후된 외환 시스템 방치는 경제안보 위협 요인
만약 부채 디플레이션이 심각해지면 정부는 가계의 채무상환 능력을 확충해 디레버리징이 경제활동에 미치는 파급효과를 줄여야 한다고 IMF는 제안한다. 물론 모럴해저드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잘 설계된 정부 정책 뒷받침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향후 금융회사에 소구권이 없는 비소구 주택담보대출을 병행하는 것도 검토해볼 만하다. 비소구 대출 시 대출금리가 오르기 때문에 차입자는 그만큼 신중하게 되고 무엇보다 빚의 위험을 분산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이미 시작된 인구학적 변화는 기존 복지·연금제도의 지속가능성 문제를 야기하며 제도개혁은 이제 더는 피할 수 없는 문제가 됐다. 그러나 지적했듯이 장기적으로 노인 빈곤 문제가 해소되지 않는 한 고령화에 따르는 고통은 필연적이다. 노인 빈곤은 무엇보다도 짧은 생애 주된 근로기간에서 비롯한다. 같은 직종에서 노동자가 35년 남짓 일하는 유럽과 비교하면 우리나라는 터무니없이 짧다. 생애 주된 근로기간을 연장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지대추구형 교육 시스템을 선진화된 평생교육 시스템으로 대체해야 한다.
팬데믹과 전쟁은 많은 것을 바꾸고 있다. 미·중 갈등은 적어도 우리가 상상하는 시간대에서 더 첨예해질 수는 있어도 개선될 가능성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높아지는 지정학적 위험을 극복할 수 있는 경제안보 역량이 요구된다. 다자간 자유무역협정인 CPTPP(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가입은 지정학적 위험이 높아지는 가운데 새로운 시장을 확보할 수 있는 중요한 출구다.
모두 열거할 수 없지만 우리 앞에 놓은 숱한 과제와 도전을 슬기롭게 해결하고 극복하지 못하는 것은 그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많은 이해 당사자가 자신의 처지에서 합리적인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개혁으로 얻는 이득보다 갈등에 따른 비용이 더 크다는 연구도 있다. 그러므로 다툼을 중재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국가 경영 능력(Statecraft)이 필요하다. 이념이나 원칙이 아무리 숭고해도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김경수 성균관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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