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지역사회 치료·재활·복귀에 정신건강 정책 초점 맞춰라
정신건강은 사회적 자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국민의 정신건강이 좋으면 사회적 자본인 신뢰와 협력이 강화되고, 사회적 자본이 든든하면 국민의 정신건강도 따라서 좋아진다.
이 때문에 현대사회에서 정신건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정신건강에 대한 투자가 적고 만성 정신질환을 대하는 방식에도 구조적 문제가 있다.
선진국은 이미 지역사회에서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동시에 당사자의 인권을 중시하고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정책이 분명하게 실행되고 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대형 주립정신병원에 환자들을 입원시켜 치료하는 방식이 보편적이었다. 하지만 오랜 입원으로 인한 수용화증후군 문제, 치료 약물 개발, 환자들의 인권에 대한 요구 등으로 '탈원화(脫院化·Deinstitutionalization)' 운동이 일어났다.
그래서 주립정신병원은 병상을 정책적으로 줄여나가고 환자들을 퇴원시켜 지역사회에서 치료받고 사회에 적응하도록 하는 방향으로 정책 전환이 이뤄졌다. 물론 1960년대에 시작된 탈원화가 지역사회의 충분한 준비 없이 빠르게 진행됨에 따라 탈원화가 아니라 횡수용화(transinstitutionalization)되고 환자들은 병원 밖을 나오지 못하고 회전문에 갇혀 있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결국 이런 큰 개혁 방향이 국가적 공감을 얻고 더욱 발전해 정착하게 됐다.
영국은 오래전부터 환자 인권을 존중하는 개방 병동 운영이나 환경 치료가 발전해 미국에 큰 영향을 줬다. 유럽 국가들도 정신병동에 장기 입원하는 체계에서 탈피해 지역사회에서 당사자들과 함께 살면서 치료, 재활, 회복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특히 이탈리아는 1978년 의회를 통과한 '법 180(Law 180)', 즉 제안자인 프랑코 바살리아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이름을 딴 '바살리아법'에 의거해 정신병원에 새로운 입원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적극적인 탈원화와 지역사회 관리를 채택했다. 이탈리아는 신환의 입원을 전격 금지했지만 결국 기존의 입원 환자를 모두 지역사회로 내보내는 데 약 10년이 걸렸고 마침내 새로운 방식으로 정착하게 됐다. 현재 이탈리아에는 정신병원이 없으며, 급성기 환자들은 대학병원이나 종합병원에서 단기간 입원 치료를 받고 퇴원한 후 지역사회 정신재활 치료에 참여하면서 일상생활에 적응하고 있다. 정신건강의학과를 다시 의학의 본류로 돌려놓고 내과나 외과 환자와 똑같이 환자들을 종합병원에 가서 치료받게 하고 따로 정신병원을 두지 않는 것을 정신의학의 주류화라고 부른다.
호주는 1992년부터 연방정부가 적극 개입해 전국적인 탈원화와 주류화가 이뤄졌으며, 지역사회 거점 종합병원이나 대학병원에 소규모 입원 시설이 있다. 환자들은 퇴원 후 지역사회 센터에서 외래 치료와 재활 치료를 받고 국가가 제공하는 여러 복지 서비스를 지원받을 수 있다.
아시아 국가에서도 광범위한 정신보건 개혁이 일어났다. 대만과 홍콩은 지역거점 공공 정신병원에서 입원 치료와 재활 서비스, 낮병원, 직업재활 서비스를 제공하고 지역사회 시설과 연계해 사회 적응을 돕고 있다. 응급입원 환자들은 원칙적으로 공공시설에 입원하기 때문에 입원 과정에서 인권과 관련한 갈등도 많지 않다. 특히 홍콩은 1990년대 이후 탈원화와 지역사회 복귀 및 회복을 위한 다양한 시범사업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정신병원이 국립병원인 IMH(Institute of Mental Health)가 유일하며, 정신의학의 전 영역을 담당하고 정신건강 교육과 정책에도 관여한다.
세계적으로 중증 정신장애 서비스는 국가가 책임지며, 당사자의 인권과 자기결정권을 존중하고 당사자와 가족을 지원하고 옹호하는 체계를 확립하는 추세다. 또한 공급자 중심의 재활에서 당사자 중심의 '회복' 개념으로 변화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젠 세계적 추세에 맞춰 서비스를 개선하고 법과 제도를 바꾸며 분절화된 지역사회 서비스를 통합하는 대대적인 혁신의 노력을 기울일 시점이 됐다.
[기선완 중앙정신건강복지사업지원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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