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이 궁금해지는 ‘힘 뺀’ 글쓰기

한겨레21 2022. 11. 1.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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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의 글쓰기]내 얘기가 독자에게 가닿기를 간절히 바라는 행위 ‘글쓰기’
2022년 10월 서울 종로구 혜화동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참가자가 원고지에 글을 쓰고 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20년 가까이 글쓰기 강의를 하면서, 말과 글을 주제로 <한겨레>에 매주 칼럼을 쓰는 김진해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가 ‘글쓰기’를 주제로 4주마다 한 번 칼럼을 연재합니다. 일방적인 글쓰기 강의가 아니라, 독자 여러분의 글을 받아서 직접 의견을 다는, 쌍방향의 글쓰기를 지향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_편집자

저는 신문 <한겨레>에 ‘말글살이’라는 이름으로 매주 칼럼을 쓰고 있습니다. 벌써 3년6개월이 되어가는군요. 만나는 분마다 “와, 대단하네요. 어떻게 다른 주제로 매주 꼬박꼬박 글을 쓸 수 있데요?” “쓸 주제를 몇 개 정도는 준비하고 있죠?” “나도 써봐서 아는데, 짧게 압축해서 쓰는 게 훨씬 어렵던데 그걸 매주 하는군요” 하며 칭찬해줍니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내심 우쭐하기도 하지만, 글을 쓰는 제 모습을 본다면 분명히 ‘글 쓰는 게 저렇게 난리법석을 떨 만한 일인가’ 하실 겁니다.

쓰기만 하면 ‘대문호’일 텐데?

이 글을 쓰면서 신문 칼럼을 처음 준비할 때와 똑같은 짓을 반복했습니다. 한 달 내내 서재와 도서관에 있는 ‘글쓰기 책’을 뒤적거렸습니다. 글쓰기 책만이었겠습니까? 수사학책이며 거창한 철학책도 훑고 있더라고요. 이 과정은 글쓰기를 처음 하는 사람이 자주 겪는 시행착오입니다. 이 호들갑이 아주 쓸모없지는 않지만, 가급적 빨리 졸업하는 게 좋습니다. 책만 뒤적거리는 건 비범한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앞서서일 겁니다.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또렷하지 않아서겠죠. 생각을 가다듬는 데 책이 도움되긴 하지만, 책만 뒤적거리다간 낭패 보기 십상이죠.

저처럼 매주 글을 쓰는 사람도 왜 이리 글쓰기가 어려울까요? 드라마나 영화의 주인공이 글 쓰는 모습을 보면, 푹신한 의자에 앉아 멋진 만년필로 종이에 쓱쓱 쓰기만 하면 바로 그럴듯한 글이 나옵니다. 안 써서 그렇지, 쓰기만 했다면 여러분도 대문호가 되었을 겁니다!

저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부드럽게 말해 난리법석이라 했지만, 정확하게는 ‘지랄발광’을 합니다. 서재에 꽂힌 책을 다 내려 탑을 쌓아놓습니다. 몇 평 되지도 않는 집안을 괜히 휘젓고 다닙니다. 자빠져서 천장을 멍하니 쳐다봅니다.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고 가짜 잠을 잡니다. 안 하던 대청소를 시작합니다. 느닷없이 목욕을 합니다. 배가 부른데도 자꾸 먹을 걸 찾습니다. 곁에 있는 사람에게 수시로 신경질을 부립니다. 가관인 거죠.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을 보면, 주인공 카추샤가 독살 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법정에 섭니다. 우리는 판사들이 증거를 바탕으로 정의롭게 사건을 다룰 거라 기대합니다. 하지만 재판장은 재판을 빨리 끝내고 숨겨둔 애인이 기다리는 호텔로 달려갈 궁리만 합니다. 배석판사도 아침에 아내와 돈 문제로 다퉈 기분이 좋지 않아 피고인들에게 괜한 신경질을 부립니다. 각기 다른 꿍꿍이와 변수가 얽히고설켜 무고한 주인공은 유죄판결을 받습니다. 글 쓰는 사람이 처한 상황도 비슷합니다. 진공상태가 아닌 뭔가가 얽힌 채 글을 씁니다. 예측불허의 복잡한 상황 속에서 쓰는 것이죠. 해결해야 할 크고 작은 일들이 나를 집어삼킬 듯이 노려보고 있습니다. 글은 쓰든 말든 알아서 하고, 급한 일부터 하라고. 모든 게 해결된 평화로운 시간은 드물거나 없습니다. 피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글을 쓰려는 걸까요?

김진해 경희대 교수는 최근 ‘22학번이랑 ‘반말 모드’ 하는 50대 교수의 정체’(스브스뉴스)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스브스뉴스 화면 갈무리

내 얘기를 들어주세요

글쓰기는 내 얘기가 독자에게 가닿기를 간절히 바라는 행위입니다. ‘당신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으니 잠깐 시간을 내어주세요.’ 글은 독자와 공명하고 싶을 때 하는 작업입니다. 독자의 머리끄덩이를 낚아채거나 멱살을 잡으려는 게 아닙니다. 물론 그 공명의 성격이나 진폭에 따라 공감을 얻기도 하고 마음에 격동을 일으키기도 하며 결정적인 각성의 계기를 선물하기도 합니다. 다만 그건 오롯이 독자의 몫입니다. 글쓴이는 오직 겸손한 자세로 독자와 공명하려고 시도할 뿐입니다. ‘내 얘기를 들어주세요.’ 자세를 낮추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곡진하게, 간절하게, 간곡하게 말해야 합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자기 얘기만 퍼붓는 사람은 거북합니다. 끝까지 듣기도 어렵죠.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 글을 읽어줄 사람의 상태를 살피면서 써야 합니다.

좋은 글은 ‘그 글의 주인이 보고 싶어지는 글’입니다. 백과사전이나 요리법처럼 어떤 정보를 알려주는 글을 보고 글쓴이가 궁금하지는 않잖아요. 촘촘한 논리나 멋진 표현이 아닌, 글 속에 글쓴이의 목소리와 체온이 담긴 글을 만나면 그 사람을 만나보고 싶어지죠. 살아오면서 한 가지 일만 했다면 어떻게 그리 뚝심 있게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며 버텨왔는지,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리 다양한 경험 속에서 자신을 지켜왔는지, 뭘 할지 몰라 방황하는 사람이라면 그 방황의 냄새와 깊이가 궁금합니다. 확고한 글보다는 흔들리는 글, 배회하는 글, 찾아헤매는 글, 삶의 두께가 느껴지는 글을 쓴 사람이 보고 싶더군요. 글의 주인이 보고 싶어지는 글은 그 글이 나에게 와닿았다는 뜻입니다. 굳이 글을 쓰는 이유도 누군가에게 가닿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겠지요.

예를 들어볼까요. 다음 두 글을 비교해보세요. ‘나는 눈치를 많이 본다. 상대방을 과하게 의식하면서 예의를 차린다.’ ‘나는 아는 사람을 만나면 두 번 인사한다. 먼저 ‘안녕하세요’라고 하며 고개를 숙이고 상대가 ‘안녕하세요’라고 답하면 다시 ‘안녕하세요’라고 하며 고개를 숙인다.’ 둘 다 비슷한 얘기이지만 저는 두 번째 글을 쓴 사람이 보고 싶습니다. 구체적이어서 머릿속에 장면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그런 자세로 사람을 대하는 분을 직접 만나고 싶어집니다.

모니터를 보며 상대방을 상상해보기

글의 주인이 보고 싶어지는 글을 쓰려면 무엇보다 몸에 힘을 빼야 합니다. 젠체하며 목을 빳빳하게 세우고 핏대를 올리는 사람은 가급적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글에도 그런 게 다 담깁니다. 이런 글은 내용이나 표현이 하나같이 진부하고 자기주장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운동에서 코치가 선수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힘 빼’라는 말입니다. 국민타자 이승엽 선수의 타격자세를 보면 손과 허리에 힘을 빼고 바람을 가르듯이 방망이를 휘두릅니다. 축구공을 정확하게 멀리 차려면 발목에 힘을 빼야 합니다. 농구에서도 손목에 힘을 빼야 슛이 부드럽게 잘 들어갑니다. 힘을 바짝 줘야 할 것 같은 역도나 유도에서도 힘을 빼라고 합니다. 힘을 빼야 상대방의 움직임을 살피는 여유가 생기고 걸리적거리는 것 없이 빠르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글도 힘을 뺀 글이 좋습니다(힘빼기에 대해선 나중에 본격적으로 다루겠습니다).

힘을 빼려면 글 쓰는 과정에서 상대방을 느끼려고 하는 게 좋습니다. 상대를 의식한다고 해도 좋습니다. 이게 제일 중요합니다. 내 글이 상대방에게 가닿으려면 상대방의 기운을 느껴야 합니다. 물론 상상입니다. 그걸 어떻게 하냐고요? 글쎄요, 저도 어렵습니다. 눈앞에는 공책이나 모니터밖에 없는데, 글을 쓰는 과정에서 상대의 기운을 느낀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그래야 합니다. 글쓰기는 두 사람의 작업입니다. ‘2의 경험’이랄까요. 작가와 독자의 대화. 누군가 내 얘기를 듣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쓰는 겁니다.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마구 내뿜는 게 아니라, 독자의 기운을 느끼면서 그 독자에게 내 얘기를 간절하게 풀어내야 합니다. 그러면 독자는 나의 건너편 자리에 앉아 얘기를 듣습니다. 말도 하고요. “좀더 자세히 말해봐. 그 얘긴 좀 긴걸. 그건 말이 좀 안 된다. 다음 얘기가 궁금하군!”

어떤 글쓰기 책에서는 먼저 쓰고 난 다음에, 내 안에 있는 독자를 불러내어 이것저것 검토를 맡기라고 합니다. 제 경험으로는 처음부터 독자가 곁에 있는 게 좋더군요. 상대의 등에 비수를 꽂으려면 몰래 ‘칼을 갈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처음부터 얘기를 나누는 게 좋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존댓말로 쓰는 게 어떠냐고 제안한 것도 그 독자였고요.

제가 보고 싶으신가요

이 연재를 통해 말의 본성과 몸의 움직임이라는 두 줄기로 글쓰기를 풀어보려고 합니다. 말의 본성을 알면 글을 쓸 때 자신감이 붙더군요. 예를 들어 말에는 ‘드러내면서 감추는 특성’이 있습니다. 뭔가를 쓴다는(드러낸다는) 것은 한편으로 뭔가를 감춘다는 뜻임을 알고 글을 쓰면 글이 차분해지고 겸손해지더군요(차차 풀어가겠습니다).

몸의 움직임을 아는 사람은 글을 대하는 자세도 좋아집니다. 저는 국내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무술인 아이키도(합기도)를 5년 정도 수련하고 있습니다. 이 무술을 통해 상대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내 몸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배웁니다. 힘을 빼라는 것도 여기에서 배웠습니다. 이게 글쓰기에 엄청 도움이 되더군요(이것도 차차 얘기하겠습니다).

‘글의 주인이 보고 싶어지는 글을 쓰려면 상대방의 기운을 느끼면서 쓴다!’ 어떤가요? 이 글을 읽고, 제가 보고 싶으신가요? 그럼 성공입니다. 아니라고요? 다음 글에서 재도전해보겠습니다.

김진해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말끝이 당신이다> 저자

왜 ‘무적의 글쓰기’인가

이 연재글의 문패를 ‘무적의 글쓰기’라고 붙였습니다. 보통 ‘무적’(無敵)은 ‘매우 강해 겨룰 만한 적수가 없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더 이상 대적할 대상이 없는 사람에게 쓰죠. 무시무시한 말입니다. 만나는 적마다 다 무찌르니까요. 요즘 말로 ‘원탑’(원톱)이 되는 글쓰기랄까요.

저는 다른 뜻으로 새겨보았습니다. 한자를 가만히 쳐다보면 다르게 읽힙니다. ‘적(敵)이 없다(無).’ 적을 만들지 않는 글. 있던 적도 친구로 만드는 글. 어떤가요? 당신에게도 적이 있을 겁니다(‘척진 사람’ 정도로 합시다). 말을 섞는 게 고통스럽고 마주치기만 해도 마음이 불편해지죠. 되도록 한자리에 앉지 않으려 합니다. 살면서 그런 사람이 점점 늘면 힘듭니다.

내색은 안 하지만 많은 사람이 독자를 적으로 생각합니다. 설득하거나 굴복시켜야 할 사람으로요. 어리석으면 가르치려 들고, 강하면 논파해서 기어코 이겨먹으려 하죠. 글로 상대를 제압하고 내 주장을 받아들이게끔 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글쓰기는 상대를 제압하는 게 아니라 상대와 공존하고 싶다는 메시지입니다. 적도 친구로 만들고 싶기 때문에 치밀어오르는 말을 눌러 천천히 글로 옮기는 것입니다. ‘당신이 틀렸어!’라는 말을 할 때도 종국에는 ‘그러니 제발 나와 함께하자’고 말하는 겁니다. 현실의 모순과 갈등에 눈감자는 말이 아닙니다. 친구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거죠. 성취하기 불가능하지만 추구해야 할 자세입니다.

무적이란 말엔 ‘무적’(無籍)이란 한자어도 있습니다. ‘소속(籍)이 없다(無)’, 달리 말하면 ‘고향이 없다’ ‘근거가 없다’입니다. 글쓰기는 한 편의 글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고체로 굳어버리지 않고 움직임 속에서 생각의 흐름을 잠시 움켜쥐었다가 이내 놓아주는 거죠. 글을 하나 썼다면 잠깐 안도했다가 이내 그 글에서 떠나야 합니다. 고향이 없으니 계속 떠나는 거죠. 쓰고, 떠나고, 다시 쓰고, 다시 떠나고. 같은 글감으로 글을 써도 쓸 때마다 달라집니다. 계속 움직여야 합니다.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거기에 눌러앉지 않고, 표표히 떠나야 합니다.

무적의 글쓰기는 끊임없는 글쓰기입니다.

여러분의 글을 보내주세요

글쓰기 코너를 놀이터로 만들고 싶습니다. 혼자보다 같이 노는 게 신나죠. 독자 여러분의 목소리를 글에 섞어보려 합니다. 좋은 글과 멋진 문장은 넘치지만, 우리에겐 평범한 글이 더 필요합니다. 비범한 글이 아닌, 평범한 글에서 출발합시다. 그리고 평범함을 뛰어넘어봅시다. 아래 주제로 글을 보내주세요. 별로다 싶어도 ‘뭐 어때, 나도 썼어!’ 하는 자신감으로 보내주세요.

보내주신 글에 일일이 답신을 드리진 못합니다. 지면 관계로 글 전체를 소개하기도 어렵습니다. 우리가 글 쓰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부분을 골라 제 의견을 달아드리겠습니다. ‘무적의 글쓰기’의 세계로 함께 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주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분했을 때

분량 1천 자 정도

마감 2022년 11월13일(일)

보낼 곳 ha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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