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급등과 돈맥경화 사이… 영국·미국·일본 ‘기이한 금융정책’[Global Economy]
■ Global Economy
- 금리 올리면서 돈은 풀겠다?… 곤혹스러운 글로벌 금융시장
“액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를 동시에 밟고 있다.”
최근 글로벌 금융시장 안팎에서 주요국들의 재무부, 중앙은행 등 재정·금융당국의 모순적 행보를 두고 이 같은 지적이 제기된다. 모순의 핵심은 대개 ‘돈줄을 조이며(기준금리 인상) 동시에 푸는(유동성 공급)’ 행태에 있다. 물가 압박 해소를 위해 각국이 일제히 기준금리를 올리는 가운데, 돈맥경화(유동성 경색) 현상이 동시에 나타나자 딜레마에 빠진 금융당국이 울며 겨자 먹기로 이 같은 기이한 정책을 펼 수밖에 없다는 해석이 나온다.
◇영국에서 시작된 불길 = 불길은 영국에서 시작됐다. 9월 23일 당시 리즈 트러스 총리가 430억 파운드의 대규모 감세안과 재정지출 확대 방안을 발표하자 시장은 ‘발작’을 일으켰다. 특히 물가를 잡기 위한 영국 중앙은행의 기준금리 인상으로 조금씩 상단을 높여가던 10년물 국채금리가 순식간에 1%포인트 넘게 올라(국채 가격 하락) 장중 4.5%를 넘어섰다. 국채 투매 사태가 발생한 것으로, 영국 국채에 대한 시장의 신뢰가 ‘유럽의 병자’인 이탈리아나 그리스 수준으로 낮아졌다는 의미다. 파운드화 가치도 1.038달러까지 하락하며 역대 최저 가치를 기록했다.
국채 금리 급등은 국채를 파는 사람만 많고 사는 사람이 적은 상황을 의미한다. 신용도가 높은 국채의 인기가 시들할 정도니 이보다 등급이 낮은 회사채 시장에서는 자금줄이 마를 수밖에 없다. 신용 시장이 경색된다는 말이다. 여기에 결정적 한 방이 더해졌다. 국채 금리가 오르며 국채를 담보로 하는 파생상품에 투자한 연기금들이 담보 가치 하락으로 보유 자산을 내다 팔아야 하는 상황(마진콜)에 몰렸다. 결국 9월 28일 영국 중앙은행은 채권시장 안정을 위해 10월 14일까지 650억 파운드(약 102조 원) 규모의 긴급 국채 매입 프로그램을 가동할 수밖에 없었다.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올리는(돈줄을 죄는) 가운데, 동시에 채권을 매입해 시장에 자금을 공급하는 양적 완화(돈 줄 풀기)를 시행한 셈이다. 중앙은행의 이 같은 정책으로 시장은 잠시 안정을 되찾았으나 혼란은 트러스 총리가 조기 사퇴하고 리시 수낵 신임 총리가 취임해 기존의 감세안을 완전히 뒤집을 때까지 이어졌다. 수낵 총리 취임 후 10년 물 국채금리는 3.6% 수준으로 내려와 안정을 되찾았다.
◇구두 개입 나선 미국 = 영국의 불안은 미국으로 이어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미국 10년물 국채금리 역시 상승세를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가 기준금리를 올리며 10년물 국채금리가 1984년 이후 12주 연속 최장기 상승하는 가운데, 영국발 금융불안이 가세해 최근에는 장중 4.3%를 넘어서며 14년 만에 최고치를 찍었다. 이에 미국에서도 신용 경색 경고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최근 블룸버그 집계에 따르면 블룸버그 미국 국채 유동성 지수는 최근 2020년 3월 이후 처음으로 2.5를 넘었다. 이 지표는 미 국채의 금리가 적정 수준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났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숫자가 클수록 유동성이 부족하다는 의미다. 코로나19 초기인 2020년 3.0을 넘었다가 Fed가 진화에 나선 뒤 1.0 미만으로 안정된 바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fA)는 지난 10월 20일 낸 보고서에서 “미 국채 시장은 취약한 상태이며, 충격이 하나만 더 발생하면 시장이 제대로 기능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미 재무부도 상황이 심각하다고 보고 대책 마련에 나섰다. 재닛 옐런 재무장관은 지난 10월 12일 “(미 국채 시장에서) 충분한 유동성이 없어지는 데 대해 우려하고 있다”며 구두 개입에 나선 데 이어 10월 24일에도 “(가격이 떨어져도 미국 국채를 받아줄 곳이 점점 없어지는) 국채시장의 유동성 촉진을 위해 여러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며 “국채시장이 깊고 유동적이고 잘 기능하기를 바란다”고 재차 밝혔다.
특히 재무부는 국채 거래를 촉진하기 위한 여러 조치와 더불어 유동성이 부족한 장기물을 되사는 ‘바이백’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미 Fed가 국채를 시장에 내다 팔고 유동성을 흡수하는 양적 긴축을 벌이는 가운데 재무부가 반대의 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는 의미다. Fed가 12월에 예상과 달리 기준금리를 한 번에 0.75%포인트 올리는 ‘자이언트 스텝’이 아니라 0.5%포인트만 올리는 ‘빅스텝’에 나설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도 최근 급격하게 말라가는 시중 유동성과 관계가 있다는 평가다.
◇모순 아니라는 일본 = 영국이나 미국과 달리 금융 완화 정책(단기 금리 -0.1% 동결)을 유지하고 있는 일본 중앙은행도 모순에서 자유롭지 않다. 특히 일본의 모순은 엔저를 막기 위해 시장에 개입하는 동시에 10년물 국채금리를 0.25%로 묶어두는 ‘수익률곡선제어’ 정책을 유지하는 데서 발생한다. 엔저를 막기 위해 달러를 팔고 엔을 사는 개입을 하면 통상 시중 엔화가 감소하며 엔화 표시 채권 금리가 오르는 흐름이 조장된다. 이는 일본 중앙은행이 국채를 대량 매입해 시장에 엔화를 풀고 초저금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과는 반대 상황을 유도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일본은행 총재는 지난 9월 22일 24년 만에 첫 외환 시장개입에 나선 뒤 기자회견에서 이 같은 지적을 받고 “목적도 효과도 다르다”면서 “그것이 조합돼 더욱 적절한 상황이 생기는 것이 폴리시믹스(정책조합)”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 같은 모순 정책이 오래 갈 수 없다고 보고 있다. 시노하라 나오유키(篠原尙之) 전 일본 재무성 차관은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은 액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를 동시에 밟고 있다. 차에서 그렇게 하면 브레이크가 손상되거나 핸들을 제어할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한국은행도 최근 딜레마 상황에 놓여있다. 한국은행은 최근 채권시장 신용 경색이 이어지자 금융권으로부터 금융안정특별대출 제도 재가동을 요청받았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제도는 코로나19 사태 때 한시적으로 시행됐으며 한은이 직접 거액의 유동 자금을 공급한다는 특징이 있다. 시장에서는 ‘최종병기’ 한은이 그간 긴축적 통화정책과 어긋날 수 있다는 딜레마에 빠져 대규모 유동성 공급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본다. 다만 한은이 이달 말 금융통화위원회에서 ‘빅스텝’ 대신 ‘베이비스텝’(기준금리 0.25%포인트 인상)에 나설 가능성은 커졌다는 평가다.
임정환 기자 yom724@munhwa.com
■ 중국·일본, 통화가치 하락 막으려 미국 국채 투매 … 유동성 경색, 금융위기 방아쇠 당길까
안전자산 미국 국채 금리 폭등
양적긴축 겹쳐 자금경색 심화
최근 글로벌 금융시장의 최대 화두는 미 국채 금리 상승(가격 하락)이다. 일각에서는 급격한 유동성 경색으로 금융위기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는 전망까지 제기된다.
1일 외신 등에 따르면 최근 미 국채 10년물 금리는 12주 연속 최장기 상승하며 장중 14년 만에 최고치인 4.3%를 넘어서기도 했다. 올해 초 미 국채 10년물 금리가 1.6%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세계 최고 안전자산으로 꼽히는 미 국채의 이 같은 금리 급등은 대단히 이례적 현상이다.
최근 미 국채 금리 상승은 그동안 국채를 집중적으로 매입해 오던 큰손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대표적으로 중국과 일본이 꼽힌다. 실제 미 재무부 등의 자료를 보면 중국은 올해 미 국채를 가장 많이 내다 판 국가다. 중국은 지난해 말 미 국채 보유액이 1조687억 달러에서 올해 7월 말 9700억 달러로 987억 달러 줄었다. 미 국채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일본도 올해 들어 697억 달러를 내다 팔면서 미 국채 보유액이 지난해 말 1조3040억 달러에서 올 7월 1조2343억 달러로 줄었다. 이들 국가가 잇따라 최고의 안전자산으로 불리는 미 국채 매도에 나서고 있는 것은 달러 강세로 자국 통화가치가 하락하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자국 통화가치 하락을 방어하기 위한 ‘역 환율전쟁’에 나서며 미 국채를 팔아 달러를 조달하고 있다는 의미다. 실제 올해 들어 달러 가치는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전 세계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화의 평균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는 올해 초만 해도 96선이었지만 최근 110선까지 오르는 등 14% 이상 급등했다. 9월 28일에는 장중 114.745까지 치솟으며 2002년 이후 20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을 보였다.
여기에 코로나19 이후 미 국채를 사들이며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양적 완화)하던 미 연방준비제도(Fed)가 양적 긴축으로 돌아선 점도 영향을 미쳤다. Fed는 9월부터 매달 최대 600억 달러씩 보유 국채를 시장에 내다 팔고 있다. 이는 지난 6∼8월 한도(300억 달러)의 두 배다. 물가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Fed 입장에서는 국채를 팔아 시장 유동성을 흡수하는 게 시급한 일일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미 투자전문지 배런스는 “미 국채 시장의 유동성이 말라가고 있으며, 상황은 더욱 악화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임정환 기자 yom724@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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