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록달록 병풍도의 가을꽃 축제
신안 병풍도에 맨드라미가 활짝 피었다. 코로나로 인해 매번 취소됐던 축제도 다시 열렸다. 알록달록 꽃섬을 찾아 발걸음이 모여들더니, 비로소 가을과 여행이 얼싸안고 흐드러지게 웃었다.
●신안이 품은 작은 섬, 병풍도
병풍도는 증도 서남쪽 가까이 자리하고 있는 신안군의 작은 섬이다. 매화도, 선도, 마산도, 고이도 등 이름도 생소한 섬 군락에 섞여 있지만, 12사도순례길로 잘 알려진 대기점도와 노두길로 연결돼 있어 걷기 여행자들에게는 오히려 낯이 익다. 우리나라에 병풍도란 이름을 가진 섬은 모두 세 곳이다. 태안군과 진도군에 또 다른 병풍도가 있다. 두 곳 모두 이름처럼 거칠고 꼿꼿한 암석으로 이뤄져 있는 무인도이며 신안의 병풍도에만 300여 명의 주민이 산다.
●오랜만이야, 12사도순례길
병풍도로 들어가기 전에 12사도순례길을 다시 걸어 보기로 했다. 완성되지 않았던 2년 전의 모습이 어떻게 채워졌는지 자못 궁금했기 때문이다. 소악도 선착장에 여객선이 닿자 꽤 많은 여행객이 함께 내렸다. 아직 선실에 남아 있는 이들은 대기점도나 병풍도를 기점으로 여정을 시작할 것이다. 한편, 병풍도는 지도읍 송도항에서도 배가 다닌다. 그 덕분에 여행객들은 걷거나, 차량을 이용하거나 혹은 자전거를 타며 원하는 대로 다양한 동선과 일정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소악항 주변으로 작은 카페와 입도를 인증하기에 충분한 예쁜 포토존이 생겨났다. 섬사람들의 따뜻한 배려다. 12개로 이어진 예배당의 모습들은 여전했고 사이사이 놓인 섬 길은 계절이 녹아들 만큼 관록이 생겼다. 소악교회의 앞마당은 화려한 정원으로 꾸며졌다. 빨간색 꽃 배 위 '방랑자에서 순례자'란 문구가 시선을 끈다. 순례길은 기독교의 색채를 띠고 있지만, 걷는 이들은 오히려 종교에 자유롭다. 그래서 소악교회는 모든 종교인과 무신론자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문턱을 낮췄다. 잠시 멈췄던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딴섬, 진섬, 소악도, 소기점도, 대기점도 등 순례길 섬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화단이 고운 자태를 뽐냈다.
소기점도 '순례자의 섬 게스트하우스 겸 식당'에서는 1인 여행자도 별도의 예약 없이 식사할 수 있다. 1만원짜리 백반을 주문하자 국을 포함한 반찬이 13가지나 나왔다. 탐방객이 증가하니 자연스레 여행이 편안해졌다. 대기점도 폐교 터는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다. 섬과 섬을 잇는 '노두'를 타이틀로 갤러리, 공방, 카페가 들어설 예정이다. 새로운 볼거리, 즐길 거리가 생겨나면 머무는 시간도 늘어나기 마련이다.
●맨드라미 섬, 병풍도
대기점도와 병풍도를 잇는 1.1km의 노두길 양옆으로는 청정 갯벌이 광대하게 펼쳐져 있다. 농게와 망둥이들의 터전이다. 노두길은 만조 전후 몇 시간을 제외하면 차량이나 도보로 통행할 수 있다. 병풍도는 평지와 구릉이 면적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반면 섬의 서쪽에는 작은 산이 하나 솟아 있으며 바다와 만나는 그 자락에는 침식으로 형성된 해식애가 분포돼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이 또한 병풍을 두른 모습이다.
대기점도에서 드문드문 시작된 맨드라미의 향연은 병풍도 마을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축제를 위해 마을 뒤편 6만6,000여 평방미터의 야산에는 30여 품종, 5,500만 송이의 맨드라미가 식재되었다. 닭 볏을 닮은 맨드라미는 여름 끝 무렵에 개화를 시작해 60~120일간 탐스러운 자태를 유지하는 가을꽃이다. 병풍도 마을의 지붕 색은 온통 붉은색이다. 신안의 섬 중 자색고구마의 박지도를 보라색, 수선화의 선도를 노란색으로 칠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병풍도와 맨드라미 사이에는 염전이라는 연결고리가 있다. 약효가 있는 소금을 만들기 위해 본디 한방에서 약재로 쓰였던 맨드라미를 염전 부근에 심은 것이 그 시초다. 관광 콘텐츠가 없는 병풍도가 맨드라미 섬으로 탈바꿈한 데는 이후 주민들의 의지와 노력이 동반됐다. 잡풀이 무성했던 야산을 개간해 꽃이 피기 좋은 환경을 만들고 편의시설과 조형물들을 설치해 손색없는 축제의 꽃동산을 이뤄낸 것이다.
●막걸리 횡재
마을에서 동산으로 올라가는 길가에는 '맨드라미 분식'이란 이름을 가진 창고 건물이 있다. 대수롭지 않게 지나쳐 가려다 현수막에 쓰인 호박 식혜에 눈길이 갔다. 별다른 기대 없이 3,000원을 내고 산 호박 식혜는 한 모금 마시는 순간 감탄사가 절로 터졌다. 진한 호박 향이 식혜 본연의 맛에 적절하게 녹아드니 구수하고 달큰한 맛이 일품이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호박 식혜의 성공에 힘입어 고구마 막걸리가 궁금해졌다. 분식점 주인 김두경(69)씨는 고구마를 발효시켜 만든 막걸리에 작년 11월에 따서 세 번 덖어 말린 맨드라미 꽃을 첨가했다고 귀띔해 줬다. 병풍도 촌부의 연보랏빛 수제 막걸리에선 살짝 내비쳤던 단맛조차 전혀 거슬리지 않고 걸쭉하고 깊은 풍미가 느껴졌다. 눈만 호강하는 줄 알았더니 뜻하지 않은 곳에서 입마저 횡재한 셈이다.
보기선착장까지는 3km를 더 걸어야 한다. 마을을 벗어날 무렵에는 해바라기가 배웅하더니 들판으로 나서자 코스모스가 반긴다. 하늘은 높고 바람은 걷기 좋을 만큼 살랑거린다. 누렇게 변한 들판을 넘어서면 광활한 염전지대가 나타난다. 곳곳이 섬 삶의 흔적들이다. 벼가 베일 무렵에는 천일염의 출하도 끝이 난다. 가을 섬은 풍요롭고 그윽하며 결국 애틋하다.
여객선
▶ 압해도 송공항 → 병풍도 1일 4회 운영(소악도, 소기점도, 대기점도 기항)
▶ 지도 송도항 → 병풍도 1일 5회 운영
*김민수 작가의 섬여행기는 대한민국 100개섬을 여행하는 여정입니다. 그의 여행기는 육지와 섬 사이에 그 어떤 다리보다 튼튼하고 자유로운 길을 놓아 줍니다.
글·사진 김민수(아볼타) 에디터 강화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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