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조선소·창고의 현대미술, 부산을 기억하다
“부우웅~ 부우웅~” 뼛골 건드리는 으스스한 바람과 함께 멀리 밤배 지나가는 뱃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명승 태종대와 한국 조선업 시발지로 유명한 부산 영도(影島). 이 ‘그림자의 섬’에서 2000년대 한국 노동운동과 한국 현대미술이 거센 바람에 너덜거리는 풍경을 만났다.
지난 10월7일 저녁 부산 영도구 동삼동 폐조선소 공장 안. 뼈대만 남은 조선소 한쪽 벽면에서 초로의 여성 노동자 앞에 노동자들이 모여들어 함성을 울리는 장면을 담은 대형 스크린이 빛을 내고 있었다. 2011년 309일 고공크레인 복직 투쟁을 벌였던 노동운동가 김진숙씨가 투쟁을 마치고 내려오면서 한진중공업 노동자들과 결의를 다지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다. 2014년 김정근 감독이 만든 다큐 <그림자들의 섬>의 한 장면을 휑한 골조만 남은 조선소의 야외극장에서 틀어주고 있었다. 두툼한 옷을 입고 작품을 보는 관객은 단 두명. 지난 9월 초 시작한 부산비엔날레 전시 현장 가운데 손꼽을 만한 풍경이었다.
대형 스크린 영상과 마주보는 거대한 설치작품이 있었다. 이미래 작가의 신작 <구멍이 많은 풍경: 영도 바다 피부>다. 철골 구조물에 기름 묻은 공사장 가림막 조각들이 너덜거리는 이 작품은 지난 9월 태풍 힌남노가 내습하면서 강풍에 휘어지고 변형돼 올해 비엔날레의 화제작이 됐다. 태풍과 어쩌다 보니 협업한 모양새가 되어버린 이 작품은 망가져 일부만 응급 복구한 아시바 구조물과 찢겨진 공사가림막이 펄럭거리는 을씨년스런 모습으로 김진숙 노동자의 영상과 대면했다.
아트선재 큐레이터로 오래 활동했던 김해주씨가 전시감독을 맡은 이번 비엔날레는 ‘물결 위 우리’를 주제로 삼았다. 항구도시 부산의 근현대 역사, 숱한 인간 군상들의 생존을 위한 분투와 노동의 흔적 등이 깃든 영도 조선소와 부산 1부두 창고, 부산 현대미술관, 초량 산복도로 주택에다 25개국 64팀 80명 작가들의 작품 239점을 펼쳐놓았다. 김 감독은 부산의 도시 지형적 특징인 언덕과 바다가 번갈아 나타나는 모습에서 물결을 연상했다고 했다. 실제로 현장에서 더 실감나게 다가온 화두는 바람이었다. 개막 뒤 전시장인 영도와 1부두 창고에 밀어닥친 태풍이 그러했고, 영도 조선소에 황막하게 불어닥친 소슬바람은 용도를 다하고 형해화한 비엔날레에 몰아치는 바람으로도 보였다.
부산항 1부두 옛 창고 전시장은 가장 주목되는 공간이었다. 1부두 창고는 일제강점기 지어진 창고를 1970년대에 헐고 다시 지은 것으로 넓이가 약 4천㎡이다. 이 창고에서 세관을 지나 옛 부산 역전인 현 경부선 종단점 가까이 이어지는 대로는 한반도 근대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격동의 공간이었다. 김 감독은 고난 어린 부산 근현대사에서 이주와 노동, 물자의 이동이 빈번했던 공간과 여기서 삶을 겪은 이들의 기억을 현대미술로 치환한 작품들로 상기시키면서 이와 맥락이 연결되는 국외 작가들의 다른 작품들과 절묘하게 연계시켜 연대와 공유의 이미지들을 뽑아낸다. 무엇보다 비엔날레 작품들이 추상적이고 복잡하고 현란한 것들이 많은데, 이런 것들을 빼고 구체적이고 명징한 바다와 항구, 노동의 이미지들을 중심으로 배치 전략을 짰다. 부산과 관련해 항구도시, 노동의 도시를 일깨우는 구체적인 실물들로 출품작들을 내놓은 것이 돋보였다.
본전시가 열리고 있는 낙동강변 을숙도 부산현대미술관 전시장 1층 들머리와 지하층의 내부는 작품들의 이미지와 메시지가 가장 강렬했다. 영국 여성 작가 필리다 발로가 부산현대미술관 1층 들머리 공간에 설치한 대형 설치작품 <블루캐처: 2022>는 투박한 시멘트 덩어리와 철골 기둥, 부산 어선에서 쓰던 그물들이 결합돼 고된 노동으로 형성된 항구 특유의 이미지를 압축했다. 마치 해머처럼 들어올려진 콘크리트 덩어리를 통해 부산의 도시 역사에 작용했던 전쟁과 자본의 압박, 폭력성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폭력적으로 해머를 내리치는 듯한 발로의 작품은 바로 옆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의 원주민 축출과 백인들의 점령사를 담은 샌디 로드리게스의 그림들과 긴밀하게 어울리는 구도가 되었다.
안쪽에 있는, 감민경 작가가 목탄으로 그린 대작 회화 <동숙의 노래> <0시의 땅> <파도>는 시각적 흡입력이 압도적이다. 한국에서 가장 환각적인 리얼리즘 회화를 구사하는 작가라고 할 만한 필력을 유감없이 뽑아냈다. 1960년대 이래 부산에서 오래 살아본 사람만이 느끼고 기억할 수 있는 개인사의 단편, 과거 산복도로 공간들을 절절한 묘사와 환각적 터치의 배경으로 증폭시켜 끄집어낸다. 남화연의 영상작업 <당신은 오직 두번 산다>는 부두 바닥의 물의 드나듦을 미세하게 포착하면서 부산 이주민 역사가 물결 위에 지난 100년간 이어져가며 덧없이 흘러간 것들임을 서정적으로 통찰해냈다.
부산의 역사와 자연을 구성한 물질과 노동에 대해 폐부를 찌르는 핍진한 체험에서 우러나온 개별 작품들의 성취를 빼놓을 수 없다. 김도희 작가는 7개를 잇달아 붙인 거대 화폭에 칠한 표면을 연마기로 벗겨내고 과거의 칠한 흔적을 드러나게 한 <살갗 아래의 해변>을 내놨다. 선박 표면의 따개비와 녹을 벗겨내는 부산 영도 깡깡이마을에서 자란 기억이 작업 모티브로 깔렸다. <삼국지>에서 배들을 쇠줄로 묶어 결사 대결하는 연환계란 전법을 끌고 들어와 지구상의 해양케이블을 한데 묶어 불안정한 세계화의 균형을 조형화한 현남 작가의 설치작업도 수작이었다.
성과 못지않게 활력과 싱싱한 담론적 화두가 없다는 한계도 명확하다. 넓고 높은 공간에 수많은 작품들을 올망졸망 벌여놓고 특정 주제를 제각기 발언하게 하는 병렬식 구도의 비엔날레는 진부하고 퇴행적임을 일러준다. 부산의 역사와 삶에 대한 시각예술가들의 독특한 보고서를 공개한 박물관의 기획전에 가깝다는 느낌이다, 전시는 6일까지.
부산/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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