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샷] 왜군 물리친 항왜처럼 바이러스 막는 바이러스

이영완 과학전문기자 2022. 11. 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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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게놈에 정착한 바이러스 유전자
태반 세포 연결해 방어막 형성
외부 바이러스 차단 물질도 생성
바이러스가 주는 치료제 보물상자
인간의 게놈(유전체)에는 과거 감염된 바이러스가 남긴 유전자 조각이 남아있다. 최근 인체에서 길든 바이러스 유전자가 태반을 보호하고 외부 바이러스 감염을 차단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Pixabay

수백만 년 전 침투했던 바이러스가 오랜 세월 길들면서 우리 몸에서 태아를 보호하는 방어막을 만들고 다른 바이러스 감염까지 차단하고 있다. 적군에서 아군으로 변신한 바이러스 유전자를 이용하면 부작용 없이 병원성 바이러스를 막을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으로 기대된다.

미국 코넬대의 세드릭 페숏 교수 연구진은 지난 28일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오래전 인간 유전자에 끼어든 바이러스의 DNA가 이제 인간 세포를 다른 바이러스 감염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을 실험을 통해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번에 발견한 바이러스 유전자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항복한 왜군인 ‘항왜(降倭)’를 연상시킨다. 기록에 따르면 많은 항왜가 조선군과 손잡고 과거 동료였던 왜군과 싸워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번에 바이러스계의 항왜가 발견된 것이다.

면역 부작용 없이 바이러스 막을 길 열려

인간의 DNA에는 ‘내인성 레트로바이러스(endogenous retrovirus, ERV)’라는 바이러스성 유전물질이 있다. 레트로바이러스는 RNA로 된 자신의 유전정보를 DNA로 만들고, 이를 숙주의 DNA 사이에 끼워 넣는 바이러스이다. 이러면 숙주가 끼어든 DNA대로 대신 바이러스를 복제해준다. 코로나 바이러스도 레트로바이러스의 일종이다. 내인성 레트로바이러스는 그 중 바이러스 유전자 조각이 인간 DNA에 계속 남아 한 몸이 된 것을 말한다.

내인성 레트로바이러스는 인간 게놈의 8%를 차지한다. 게놈 중 실제 단백질을 합성하는 기능을 가진 유전자보다 4배나 많은 양이다. 레트로바이러스는 대부분 한 번 숙주에 감염됐다가 사라지지만, 일부는 에이즈 바이러스처럼 생식세포에 감염돼 다음 세대까지 전달된다. 이 과정에서 숙주 게놈에 정착하는 것이다.

앞서 연구에서 생쥐와 닭, 고양이, 양에서 이런 내인성 레트로바이러스가 밖에서 침입한 바이러스를 차단하는 면역력을 제공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코넬대 연구진은 이번에 사람 세포를 이용한 실험을 통해 인체에서도 내인성 레트로바이러스가 항바이러스 효과를 낸다는 사실을 밝혔다.

병원성 바이러스를 막으려고 인체 면역세포를 과도하게 작동시키면 건강한 세포까지 해를 입는 자가면역질환에 걸리기도 한다. 연구진은 사람 DNA의 일부가 된 고대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이용하면 그런 문제 없이 병원성 바이러스를 막을 수 있다고 밝혔다. 페숏 교수는 “이번 결과는 인간 게놈(유전체)이 다양한 바이러스를 차단할 능력이 있는 단백질 저장소를 갖고 있음을 보여줬다”고 밝혔다.

그래픽=손민균

태반 방어막 만들고 병원성 바이러스 차단

코넬대 연구진은 컴퓨터로 인간 게놈에 있는 레트로바이러스 유전자를 분석했다. 연구진은 그 중 많은 수가 배아 발생 초기나 생식세포, 바이러스에 감염된 면역세포에서 작동하는 것을 확인했다. 발생이나 면역 과정에 관여한다는 의미다.

바이러스는 열쇠를 자물쇠에 끼우듯 표면의 돌기를 숙주 세포의 수용체 단백질에 결합시켜 침투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스파이크 돌기로 사람 호흡기 세포의 ACE2 수용체에 결합한다. 미국 퍼시픽 노스웨스트 연구소의 리처드 맥로린 박사는 이날 사이언스에 실린 논평에서 “앞서 연구에서 태반의 융합세포영양막이 바이러스가 만든 돌기와 수용체의 결합으로 형성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설명했다.

융합세포영양막은 태반의 융모에서 세포들이 융합된 형태를 말한다. 모체와 태아 사이에 영영분과 노폐물을 적절히 배분하는 기능을 가진 방어막이다. 과학자들은 태반을 가진 포유류의 공동 조상에서 게놈에 정착한 바이러스가 세포 표면에 신시틴-1이라는 돌기를 만들고, 이것이 또 다른 바이러스가 만든 ASCT2 수용체와 결합하면서 세포 융합을 부른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문제는 ASCT2 수용체는 외부에서 침입한 병원성 바이러스와도 결합할 수 있다는 점이다. 태반에 방어막을 만들다 오히려 적군을 부른 셈이다. 코넬대 연구진은 인간 게놈에 있는 바이러스가 만드는 수프레신 단백질에 주목했다. 수프레신은 ASCT2에 먼저 결합해 외부에서 온 바이러스가 달라붙지 못하게 했다. 태반과 배아세포는 특히 수프레신을 많이 만드는 것으로 확인됐다.

연구진은 고양이에 감염되는 병원성 바이러스를 인간 세포에 주입했다. 이 바이러스는 ASCT2 수용체에 결합한다. 수프레신이 만들어지지 않는 인간 세포는 이 바이러스에 잘 감염됐지만. 수프레신이 있는 태반이나 배아 줄기세포는 감염되지 않았다.

반대로 태반에서 바이러스 유전자를 제거해 수프레신이 나오지 않게 하자 이제는 외부 바이러스에 쉽게 감염됐다. 다시 태반에 수프레신을 만드는 바이러스 유전자를 다시 넣어주자 항바이러스 능력도 회복됐다. 연구진은 외부 바이러스에 잘 감염되던 신장세포도 수프레신 유전자를 넣자 마찬가지로 항바이러스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확인했다.

숙주의 DNA에 자신의 유전자를 끼워 넣어 복제하는 레트로바이러스 HERV-K(붉은색)의 전자현미경 사진. 인간 DNA에 완전히 정착한 레트로바이러스 유전물질이 전체 인간 게놈의 8%를 차지한다./Klaus Boller

약물 공격 대상에서 치료제 후보로 부각

그동안 인간 게놈에 끼어든 바이러스 유전자는 종양이나 퇴행성 신경질환에 걸린 조직에서 주로 발현된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인간 게놈에 있는 바이러스 유전자 조각을 공격하는 신약이나 진단제를 개발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바이러스 유전자가 건강한 조직에서도 작동해 인체를 보호하는 기능이 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지난 18일 미국 터프츠대의 존 코핀 교수는 국제 학술지 ‘플로스 바이올로지’에 948명에서 받은 54개 조직의 1만3000여 시료를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다. 그 결과 바이러스 유전자 조각 37종이 한 개 이상 조직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종양세포뿐 아니라 태반 같은 건강한 조직에서도 바이러스 유전자가 작동하는 것을 확인했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페숏 교수 연구진은 태반의 바이러스 유전자가 면역방어 기능을 보인다는 사실을 실험으로 확인한 것이다.

페숏 교수는 “앞으로 인간 게놈에서 다른 바이러스 유전자를 찾아 기능을 규명할 계획”이라며 “우리 몸에는 치료 잠재력이 있는 단백질을 가진 보물 상자가 있다”고 밝혔다.

참고자료

Science, DOI: http://science.org/doi/10.1126/science.abq7871

PLoS Biology, DOI: https://doi.org/10.1371/journal.pbio.300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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