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륙 와인 1인자 가리자’... 美에 도전장 던진 호주 국보급 와이너리
귤화위지(橘化爲枳).
‘남쪽의 귤을 북쪽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중국 고사성어다. 귤처럼 생긴 탱자는 향기는 좋지만 먹을 수가 없다. 식물학적으로 귤과 탱자는 모두 운향(芸香·Rutacea)과에 속한다. 하지만 귤은 널리 쓸모가 많은 과일로, 탱자는 버려지는 존재로 운명이 갈렸다.
와인을 만드는 포도도 비슷하다. 품종이 같아도 키우는 지역이 바뀌면 성격이 확연하게 달라진다. 프랑스에서 수천만원 짜리 와인을 만드는 피노누아 품종을 우리나라에서 키우면 폭염과 장마를 견디지 못하고 포도 껍질이 썩어 버리고 만다.
명실상부한 호주 최고 와이너리 펜폴즈(Penfolds)는 1998년 미국에서 비슷한 실험에 나섰다. 당시 펜폴즈는 미국 캘리포니아 중부 파소 로블레스(Paso Robles)에 포도원을 가지고 있었다. 펜폴즈는 이 곳에 호주에서 가져온 엄선한 포도 묘목을 심고, 과연 미국에서도 호주 포도 나무가 잘 자랄지 20년 넘게 지켜봤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탱자가 되기는 커녕, 호주와 다른 미국 토양 특징을 충분히 머금은 포도 열매가 맺었다. 펜폴즈는 20년이 지난 2018년에 처음으로 이 포도를 거둬 와인을 빚었다. 이 와인은 지난해 ‘빈(Bin) 704′라는 이름을 달고 처음으로 시장에 나왔다.
빈 704라는 이름은 호주에서 같은 품종으로 생산한 빈 407을 거꾸로 뒤집은 이름입니다. 말 그대로 남반구 와인 이미지를 거울처럼 고스란히 담은 북반구 와인이라는 뜻입니다.
스테파니 더튼 펜폴즈 시니어 와인메이커, 2022
31일 서울 용산구 그랜드 하얏트 서울에서 열린 ‘펜폴즈 컬렉션(Penfolds collection) 2022′에서 스테파니 더튼 펜폴즈 시니어 와인메이커는 빈 704 와인이 1998년 미국 나파밸리에 직접 포도 묘목을 심는 것을 시작으로 20년 넘게 공을 들인 와인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펜폴즈는 2001년 호주 국가 문화재로 등재된 와인 ‘그란지(Grnage)’를 만드는 호주 대표 와이너리다. 호주 와인 역사는 그란지 탄생 전과 후로 나뉜다 할 정도로 이 와인이 호주 와인업계에서 차지하는 입지는 굳건하다.
그란지는 1962년 시드니 와인 박람회에 이어 1971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1회 와인 올림픽’에서 잇달아 금메달을 따냈다. 2018년 한 경매에서는 첫 빈티지인 1951년산 그란지 와인 한병이 7만8000달러(약 1억2000만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이날 자리한 더튼은 이 ‘국보급 와인’ 그란지를 포함해 빈 704 같은 펜폴즈 적(赤) 포도주 생산을 총괄하는 와인 장인(匠人)이다.
그에 따르면 빈 704는 그동안 호주 와인에만 몰두했던 호주 최고 와이너리가 전 세계 와인 시장에 ‘미국산 와인도 잘 만들 수 있다’고 외치는 도전장이다.
더튼과 함께 이 와인을 만든 와인메이커 앤드류 볼드윈 두 사람은 펜폴즈에서 보낸 시간이 총 46년에 달한다. 두 사람은 미국 와인 업계에서도 유난히 보수적인 나파밸리에서 호주 와인 보폭을 넓히기 위해 지난 몇 년 동안 미국 나파밸리와 호주 애들레이드 사이 1만3000킬로미터(km)를 수십 차례 왕복했다.
와인 업계에서 같은 국가 내 여러 지역 포도를 두루 섞는 시도는 자주 있다. 주로 저렴한 와인을 만들 때 무난한 맛을 내기 위해 이런 방법이 쓰인다. 여기저기서 수확한 포도를 한 군데 모아 버리면 각 지역 포도가 가진 세밀한 특성이 모조리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펜폴즈는 가장 미국스러운 와인, 나파밸리 성격을 잘 드러내는 와인을 만들기 위해 내로라하는 캘리포니아 포도밭에서 자란 포도를 한 데 섞는 시험을 자청했다.
호주 포도 묘목을 미국 땅에 직접 심어 포도 생장을 연구하고, 근거지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여러 구역 포도를 섞는 시도는 현대 와인 역사를 뒤적여 봐도 좀처럼 보기 드물다.
빈 704를 만드는 포도는 오크빌, 러더포드, 하웰 마운틴에서 가지고 온다. 모두 나파밸리에서 품질 좋은 포도가 나기로 손꼽히는 지역이다. 미국 와이너리 대부분은 이 지역 포도를 섞지 않는 대신, 해당 생산지 이름 한 곳 만을 붙여 비싼 값에 판다.
더튼 와인메이커는 “포도 품질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펜폴즈는 와인을 만드는 마지막 ‘분류 시음(classification tasting)’ 단계에서 추구하는 맛을 결정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 단계는 여러 지역 포도로 만든 와인을 펼쳐 놓고 10명의 와인 메이커들이 일일이 맛을 보면서 블렌딩(섞음) 비율을 판가름하는 자리”라며 “포도 품종이 갖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감안해 펜폴즈가 원하는 와인 캐릭터를 설정한다”고 말했다.
와인으로 하는 일종의 ‘퍼즐 맞추기’를 통해 원하는 와인 맛을 구현한다는 뜻이다.
이 과정에서 미국에서 만든 펜폴즈 빈 704 와인과, 호주에서 만든 펜폴즈 빈 407 와인은 서로 다른 지역에서 났다는 차이를 넘어 접점을 찾아간다. ‘같은 부모, 같은 염색체(DNA)를 지닌 쌍둥이 남매가 출생 이후 내내 서로 다른 나라에서 자라다가, 장성해 만났더니 속속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는 이야기와 유사하다.
물론 한 와이너리에서 같은 생산자가 만들었다고 해서 두 와인이 모든 부분에서 공통점만 갖는 것은 아니다. 포도가 자란 토양과 기후가 다른 만큼 뼈대는 비슷할 지라도, 성격에서 지역적인 특성이 분명히 드러난다.
와인 전문가들은 미국에서 만든 펜폴즈 빈 704를 마시면 오렌지 제스트(겉껍질)처럼 상쾌한 느낌을 주는 과일 향이 부드럽게 입 안을 쓸고 지나간다고 표현했다. 일부는 미국 나파밸리 와인 특유의 감초(licorice) 향이 뚜렷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반면 호주에서 만든 빈 407에서는 과실 향과 삼나무(cedar), 시가, 민트 향이 두드러졌다는 의견이 많았다.
“2018년산 빈 704은 검붉은 과실 향을 잘 다듬은 와인이다. 입 안에서 강한 에너지와 긴장감이 느껴지지만 동시에 세련되서 마시기가 어렵지 않다.
반면 호주에서 만든 빈 704의 형제, 빈 407 2018년산은 삼나무 향과 육즙이 풍성한 붉은 자두 풍미가 두드러진다.”
저명한 와인평론가 제임스 서클링, 2021
펜폴즈 와인을 국내에 들여오는 금양인터내셔날은 내년 상반기 우리나라에 빈 704를 선보일 예정이다. 현재 금양인터내셔날은 우리나라에 펜폴즈가 만드는 와인 50여종을 판매하고 있다.
금양인터내셔날 관계자는 “국내에서 호주 와인은 대부분 중저가 와인 시장을 중심으로 팔리고 있지만, 펜폴즈 브랜드는 중고가부터 고급에 이르는 와인 시장을 겨냥하고 있다”며 “펜폴즈를 주요 전략 브랜드로 삼아 앞으로 3년 동안 집중해서 키울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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