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자니아인 엄마를 둔 英 새 총리 [‘해’가 지는 영국②]
[비즈니스 포커스]
한때 최강국이었다가 지금은 정치·경제적으로 초유의 혼란에 빠진 영국이 새 총리를 맞이했다. 올 들어서만 셋째 총리다.
리시 수낵 신임 영국 총리는 10월 25일(현지 시간) 런던 버킹엄궁에서 찰스 3세 국왕을 만난 뒤 공식 취임했다. 취임 첫 연설 무대에는 수낵 총리 혼자였다. 원래는 가족과 지지자들이 배석해 축하하는 관례가 있었지만 생략했다. 영국이 겪는 최악의 경제 상황 등을 고려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는 취임 일성으로 “경제적 안정과 신뢰 회복”을 내세웠다. 영국 국채 금리 급등, 파운드화 급락 등 금융 시장에 충격을 일으킨 리즈 트러스 전 총리의 감세안을 완전 폐기하고 긴축 정책에 돌입할 것으로 보인다.
◆英 최초 인도계 총리
수낵 총리는 ‘처음’이란 단어가 따라붙는다. 그는 1980년생 42세로 영국 역사상 최연소 총리다. 인도계 이민자 가정 출신의 영국 첫 비백인 총리다.
그의 국적은 영국이지만 혈통의 뿌리는 인도에 있다. 영국 식민지 시절 인도 펀자브 출신인 조부모가 동아프리카로 이주했다. 수낵 총리의 아버지는 케냐에서, 어머니는 탄자니아에서 태어났다. 이들은 1960년대 영국으로 이주해 정착했다.
수낵 총리는 공식 석상에서 자신이 힌두교도임을 공공연하게 밝혔다. 2020년 하원 의원 서약 당시 기독교 ‘성경’ 대신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기타’ 위에 손을 얹었다. 힌두교 방식으로 기도하는 모습도 종종 노출했다. 올해 8월 총리 자리를 두고 보수당 당 대표 경선에 나섰을 때는 런던 힌두교 행사에 참석해 소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인도에선 일제히 환호가 쏟아지고 있다. 인도 방송 NDTV는 “인도의 아들이 제국 위로 올라섰다”고 보도했다.
◆금수저 엘리트, 부부 재산은 1.2조
‘이민자-비(非)백인’이란 수식과 달리 수낵 총리는 영국 사회의 전형적인 금수저 엘리트 정치인이다.
일단 ‘브리티시 드림’을 꿈꾸며 영국으로 넘어온 이민자 가정이 아니다. 수낵 가문은 신분 제도가 있는 인도에서도 최상위 계층인 브라만 계급이다. 아버지는 영국 의대에 진학해 의사가 됐고 이민 1.5세대인 어머니는 약사였다.
미국 유학 시절 만난 부인 악샤타 무르티도 상당한 재력가다. ‘인도의 빌 게이츠’로 불리는 나라야나 무르티 인포시스 창업자의 딸이다. 수낵 전 장관이 신고한 자산 대부분은 부인이 보유한 인포시스 지분이다. 영국 선데이 타임스에 따르면 수낵 부부의 총자산은 약 7억3000만 파운드(약 1조1995억원)다. 영국 222위 부자다.
수낵 총리는 명문 사립 기숙학교인 윈체스터칼리지, 옥스퍼드대 철학·정치·경제학(PPE), 미국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MBA)을 거쳐 골드만삭스에 입사했다.
◆고속 승진한 정치인
‘꽃길만 걸었다.’ 현재까지 수낵 총리의 정치 인생에 대한 평가다. 2015년 하원 의원에 당선돼 정계에 입문한 수낵 총리는 다른 장관 경력 없이 2020년 보리스 존슨 전 총리에 의해 바로 재무장관에 파격 발탁됐다. 영국에서 재무장관은 다른 부처 장관과 달리 ‘챈슬러(chancellor)’로 불리는 정권 2인자다. 중량급 정치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된 셈이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유행)은 수낵 총리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됐다. 더벅머리 존슨 전 총리와 달리 단정한 헤어스타일에 맞춤 정장을 차려입고 각종 지원책을 발표하는 젊은 동양계 재무장관에게 국민들의 관심이 쏠렸다. 유급 휴직 등 적극적 지원 정책을 펼쳐 호평을 받았다. ‘미래 총리감’이라는 말들이 오갔다.
존슨 전 총리의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 가장 먼저 사표를 던져 ‘배신자 이미지’로 찍히기도 했고 어설픈 ‘서민 코스프레’로 비난받기도 했지만 어쨌든 경쟁자인 트러스 전 총리가 취임 44일 만에 사임했다. 수낵 총리는 총리직 도전이라는 기회를 얻었고 성공했다.
김태림 기자 ta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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