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런왕 이승엽, 명장이 되려면

최민규 2022. 11. 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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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의 안과 밖] 홈런왕 이승엽 해설위원이 두산 베어스 신임 감독으로 임명됐다. 미국 홈런왕 베이브 루스는 감독이 될 수 없었고, 일본 홈런왕 오 사다하루는 명장 반열에 올랐다.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두산 베어스의 지휘봉을 잡은 이승엽 신임 감독. ⓒ연합뉴스

홈런왕이 그라운드로 돌아온다. 10월14일 두산 베어스 구단은 이승엽(46)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 특보를 11대 감독으로 선임한다고 발표했다.

이승엽은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홈런왕이다. KBO리그에서 홈런 467개, 일본프로야구(NPB)에서 159개를 때려냈다. 한·일 합산 626개다. ‘홈런왕’의 원조는 메이저리그의 베이브 루스다. 단일 시즌 60홈런, 통산 714홈런 기록은 이미 깨진 지 오래다. 하지만 루스는 홈런으로 야구라는 경기를 바꿔버린 혁명가다. 일본에는 통산 868홈런을 친 오 사다하루(왕정치)가 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그의 동료였던 데이비 존슨 전 LA 다저스 감독은 “메이저리그에서 뛰었다면 700홈런을 쳤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한국의 홈런왕은 이제 감독이라는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했다. 일본의 홈런왕은 감독으로도 명장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미국의 홈런왕은 감독이 될 수 없었다.

루스는 선수 생활 말년인 1935년 2월 뉴욕 양키스에서 보스턴 브레이브스로 트레이드된다. 자청한 이적이었다. 루스는 양키스의 감독이 되기를 원했지만 구단은 그를 감독 감으로 여기지 않았다. 에밀 푹스 보스턴 구단주는 루스에게 선수 겸 조감독 겸 부사장이라는 직함을 달아주며 다음 시즌의 감독 선임 가능성도 내비쳤다. 하지만 사탕발림이었다. 루스를 그저 흥행 간판으로 여겼을 뿐이다. 사정을 알아챈 루스는 배신감을 느끼며 방출을 요구했고, 결국 5월30일 은퇴 경기를 치렀다. 자유로운 신분이 됐지만 어떤 팀도 루스에게 감독 제안을 하지 않았다.

루스는 야구를 넘어선 명사였고, 명사처럼 행동했다. 20세기 초반 메이저리그 야구단의 조직 문화는 지금보다 훨씬 보수적이고 위계적이었다. 그의 자유분방한 사생활은 야구계 사람들이 생각한 ‘감독의 자질’과는 거리가 멀었다. 양키스 단장이던 에드 배로는 “자기도 관리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감독이 될 수 있나”라고 했다.

루스가 좋은 감독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의 전기를 쓴 로버트 크레이머는 “루스가 편견의 희생양이 됐다”라고 지적했다. 사생활과 감독 역량 사이에는 그렇게 큰 관계가 없다는 시각도 있다. 2019년 사망한 루스의 딸 줄리아는 생전에 “아버지가 감독이 됐다면 흑인 선수에게 문호를 열었을 것”이라고 인터뷰했다. 그랬다면 메이저리그 인종 장벽은 재키 로빈슨이 데뷔한 1947년 이전에 허물어졌을 것이다.

슈퍼스타 루스의 영광을 함께하려는 이는 많았다. 하지만 ‘감독 루스’를 위해 뛴 사람은 드물었다. 루스는 1938년 브루클린 다저스 코치로 메이저리그에 복귀한다. 양키스 시절 룸메이트였던 리오 듀로셔가 주장을 맡고 있었다. 듀로셔는 야구기자들 앞에서 대놓고 루스를 조롱했다. 듀로셔는 루스를 차기 감독 경쟁자로 여겼다. 이듬해 다저스 감독이 된 그는 뒷날 “좋은 사람은 꼴찌를 한다(Nice Guys Finish Last)”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루스에게 듀로셔는 확실히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미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홈런왕 베이브 루스(왼쪽)와 오 사다하루(오른쪽).

오 사다하루는 1980년 요미우리에서 선수로 은퇴했다. 1983년까지 조감독을 맡은 뒤 1984년 감독으로 첫 시즌을 치른다. 첫 시즌 성적은 67승 54패로 3위. 이듬해도 역시 3위였다. 1987년에 센트럴리그 우승을 차지하지만 일본시리즈에서 고배를 들었다. 이듬해 2위로 일본시리즈 진출에 실패하자 사임했다. 사실상 해고였다. 우승을 독식하다시피 했던 전성기 요미우리 구단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성적이었다.

2007년 가토 하지메 당시 SK 와이번스 투수코치에게 오가 요미우리 시절 어떤 감독이었는지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오 감독 시절 요미우리에서 투수로 뛰었다. “훈련량이 많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는 야구를 지향했다. 모험은 거의 하지 않았다”라는 게 가토 코치의 회상이었다. 어떤 시즌엔 세 번이나 팀이 이기고 있던 5회에 강판됐다고 한다. 이러면 선발투수는 승리 기록을 얻지 못한다.

가토 코치는 오의 ‘승리 지상주의’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일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오를 안다. 그 자신이 전설이 된 감독은 ‘지는 야구’를 할 수가 없다.” 요미우리 감독 시절 스트레스가 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선수들에게 속을 털어놓지 못했다. 외국인 선수 워런 크로마티 정도가 예외였다.

오 사다하루는 1995년 만년 하위 다이에 호크스와 5년 계약을 하고 두 번째 감독 지휘봉을 잡는다. 큰 모험이었다. 요미우리는 ‘순혈주의’로 유명하다. 다이에 감독 취임으로 요미우리로는 영영 돌아갈 수 없다는 시각도 많았다. 첫 시즌 성적은 퍼시픽리그 5위. 홈구장엔 감독 사퇴를 요구하는 현수막이 걸렸다. 이듬해엔 꼴찌로 떨어졌다. 성난 팬들은 구단 버스에 달걀을 투척했다.

든든한 지원군이 된 네모토 리쿠오 단장

하지만 계약 마지막 해인 1999년 마침내 일본시리즈 정상을 밟았다. 이 해를 시작으로 모기업이 소프트뱅크로 바뀐 2005년까지 7시즌 동안 정규시즌 1위 5회, 일본시리즈 우승 2회를 달성했다. 그는 2008년을 끝으로 건강 문제 때문에 감독에서 물러났다. 19시즌 동안 통산 1315승에 승률 0.540을 남겼다. NPB 역사상 여덟 번째로 많은 승리를 거둔 감독이다.

루스와 달리 오 옆에는 ‘좋은 사람’이 있었다. 전임 감독이자, 오를 후임 감독으로 영입한 네모토 리쿠오가 대표적이다. 네모토는 NPB 역사에서 손꼽히는 야구 혁신가다. 1980년대 관리부장과 단장으로 ‘세이부 라이온스 전성시대’를 열었다. 1987년 일본시리즈에서 오가 이끌던 요미우리를 무릎 꿇린 팀이 세이부였다.

네모토는 ‘다이에를 요미우리와 경쟁하는 팀으로 만들겠다. 그래야 프로야구가 산다’는 원대한 구상을 품었다. 오를 전격 영입한 이유였다. 그리고 단장으로서 이길 수 있는 팀을 만들어갔다. 오 감독 체제에서 성적이 죽을 쑤자 경질 이야기가 나왔다. 오는 뒷날 “다이에 본사에서 감독을 바꾸라는 말이 여러 번 나왔지만 네모토 단장이 애를 썼다”라고 술회했다. 오 사다하루가 구단 회장으로 있는 지금 소프트뱅크는 성적과 구단 매출에서 요미우리를 능가하는 21세기 NPB 최대 명문이다.

오 감독 자신도 달라졌다. 다이에의 홈런 타자 고쿠보 히로키는 2004년 요미우리에 입단해 이승엽과 한솥밥을 먹었다. 고쿠보는 새 감독인 하라 다쓰노리로부터 오의 요미우리 감독 시절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하라가 말해준 오 감독은 미팅에서 선수를 몰아붙이는 타입이었다. 4번 타자 하라를 비롯한 선수들은 ‘당신이 오 사다하루니까 할 수 있었겠지’라며 내심 반발했다. 하지만 고쿠보가 다이에에서 겪었던 오는 선수에게 먼저 다가오는 감독이었다. 무언가 조언을 할 때는 꼭 “옛날이야기를 해서 미안하지만”이라는 말을 앞에 붙였다.

감독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좋은 사람을 만났고, 그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자 좋은 사람이 더 늘어났다. 좋은 사람은 꼴찌를 하지 않았다. 

최민규(한국야구학회 이사)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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