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줄 마르자 ESG 접는 기업…지속가능한 투자는 지속가능할까
코로나19가 세계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2020년 초부터 전세계 자본시장을 관통하게 된 열쇳말 중 하나는 이에스지(ESG)였다. 기업이 ‘재무적 이익’뿐 아니라 환경·사회·지배구조(Environment·Social·Governance) 등 여러 ‘비재무적 요소’까지 고려해 기업 가치를 높여가야 한다는 이 개념은 경영의 새 차원을 여는 이정표처럼 보였다. 기후변화, 성평등, 사회적 정의 등 이에스지를 고려하지 않는 기업과 투자는 설 자리가 없어질 것이란 말에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올해 들어 상황이 크게 변했다. 물가를 잡기 위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금리인상에 나서며 돈줄이 마른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11일 내년도 세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7월 예측보다 0.2%포인트 낮은 2.7%로 제시했다. 당장의 수익 창출과 살아남기가 우선 과제가 된 시장에서 “이에스지는 사치”라는 주장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 “돈 드는 이에스지 멈추겠다”
4일 <블룸버그> 통신은 글로벌 컨설팅기업 케이피엠지(KPMG)의 ‘최고경영자(CEO) 설문조사’ 결과를 인용해 응답자의 절반이 “앞으로 6개월 동안 이에스지 관련 계획을 멈추거나 재고할 것”이고, 셋 중 한 명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고 답했다고 전했다. 이에스지 열풍이 불었던 지난해와 달라진 시장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제인 로리 케이피엠지 글로벌 기업 책임자는 “경영진이 다가오는 경기 침체에 맞서 사업을 지키려 하면서, 이에스지를 위한 노력이 재정 압박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과거에도 이에스지와 비슷한 말이 있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사회책임투자’(SRI)나 기업의 기부와 봉사활동 등 ‘사회공헌’은 이에스지의 원조라 볼 수 있다. 이 가운데서 이에스지가 유독 ‘먹히는’ 단어가 된 것은 급격한 기후변화에 대한 위기의식에 더해 팬데믹 이후 급격히 늘어난 유동성의 덕이 컸다. 경기부양을 위해 각국이 기준금리를 낮추고 돈을 풀며 갈 곳을 잃은 자금이 이에스지를 향한 것이다. 지난해 나온 스위스금융연구소의 연구는 “이에스지 지표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기업 주식들이 시장 평균보다 높은 수익률을 낸 것은 수조달러에 달하는 자금 홍수 덕분이었다”고 분석했다. <블룸버그>는 이 연구를 인용해 “이러한 현금 유입이 없었다면 이에스지에 베팅하는 것은 굉장한 역효과를 냈을 것”이라고 결론냈다.
하지만, 세계적인 긴축 정책으로 유동성이 줄면서, 이에스지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2월 말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석탄·석유를 생산하는 전통 에너지 기업들의 몸값이 뛰고, 전쟁이 예상과 달리 장기화되며 군수 기업의 시장 가치도 올랐다. 이에스지의 관점에선 투자를 꺼리던 기업들이다.
급기야 지난 8월 미국에선 ‘반이에스지’를 내건 상장지수펀드(ETF)가 등장했다. 미국 에너지 관련 기업에 투자하는 스트라이브자산운용의 상장지수펀드는 한 달도 안 돼 3억1500만달러(약 4480억원)를 모았다. 회사는 이 펀드가 “어떤 사회적·정치적·문화적·환경적 목표와도 관계없이 측정 가능한 수익률에 기초해 투자를 평가하게 될 것”이라고 소개한다. 오로지 기업의 ‘재무적 가치’만 들여다보겠다는 얘기다. 이 회사의 공동 창업자이자 이사회 의장인 비벡 라마스와미는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 인터뷰에서 “우리 회사는 자신이 동의하지 못하는 사회·정치적인 의제에 자기 돈이 투자되고 있는 많은 평범한 시민들을 대변한다”고 말했다.
이에스지에 대한 ‘역풍’은 이처럼 ‘착한 투자’나 ‘정치적 올바름’ 같은 말에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한 이들의 마음을 공략했다. 미국에서는 공화당 성향이 우세한 일부 주에서 반기를 드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텍사스주는 지난해 주 연기금이 에너지기업을 배제하는 기업 투자를 철회하도록 하는 법안을 채택했고, 플로리다주도 주 연기금이 재무적 성과만을 고려하도록 했다.
존 슈로더 루이지애나주 재무장관은 5일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에 보낸 서한에서 “당신들의 노골적인 화석연료 반대 정책이 루이지애나주의 경제를 파괴할 것”이라며 펀드에서 주 자금을 뺄 것이라고 경고했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올해 7월까지 보수적인 색채가 강한 17개 지역에서 만들어진 반이에스지 관련 법안은 44개에 이른다. 이는 지난해 12개와 비교하면 매우 많이 증가한 수치다.
■ “어떻게든 돈 벌겠다는 건 ‘디스토피아’적 생각”
반론도 만만치 않다. 기후변화의 속도는 여전히 가파르고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사회적 불평등은 심화됐다. 이에스지를 고려한 기업 투자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만큼 지금의 ‘역행’ 흐름은 길지 않을 것이란 주장이다. 앤드루 힐 <파이낸셜 타임스> 선임 에디터는 9월 “사회처럼 기업도 예측 가능한 일직선의 길을 가지 않는다. 비틀거릴 수도, 반대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며 “수익 창출만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유토피아와 반대되는 ‘디스토피아’에 비유했다.
글로벌 회계 기업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가 10일 발표한 보고서도 시장이 결국 디스토피아가 아닌 유토피아를 지향할 것이라고 결론내고 있다. 미국 기관투자자의 절대다수인 81%가 2년 안에 이에스지 투자를 늘릴 의향이 있고, 미국 내 이에스지 투자 금액도 지난해 4조5천억달러에서 2026년에는 10조5천억달러로 갑절 넘게 늘어날 것이란 전망이다. 이들은 “일부 주 정부가 이에스지를 끌어내리려 노력한다 해도 미국 투자자들의 전반적인 방향성은 명확하다”고 결론냈다. 보고서는 오히려 투자 수요에 비해 이에스지 관련 상품을 공급하겠다는 곳이 적어 수요가 공급을 앞지를 수 있다고 예상했다.
글로벌 컨설팅기업 맥킨지도 8월 보고서에서 이에스지가 일종의 ‘사회적 자격’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들은 보고서에서 “이에스지라는 약어는 다소 빛을 잃었을지 모르지만, 그 아래 깔린 명제는 여전히 필수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고 전했다. 이어 “이에스지를 향한 노력은 일종의 여정이고 그 길에서 걸림돌이 예상된다”면서도 “기업에 ‘사회적 자격’은 산소 같은 것이고, 이들은 사회적 자격 없이 살아남을 수 없다. 기업은 이해관계자와 대중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앞서 나가야 한다”고 했다.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임원을 지낸 테런스 킬리는 17일 <월스트리트 저널> 칼럼에서 이에스지 펀드가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은 문제적 기업들을 완전히 배제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에스지 투자자들이 화석연료 기업 등을 투자 대상에서 아예 배제해 왔는데, 이는 기후변화를 완화하는 데 도움 되는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갈색’ 기업을 ‘녹색’으로 바꾸는 것에서도 가치를 만들 수 있다”며 “변화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더러운’ 산업과 기업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스지의 실패는 목표가 아닌 방법론상의 문제였다는 얘기다.
이에스지가 여전히 필수라고 주장하는 맥킨지 보고서는 “모든 기업은 ‘우리 회사가 사라진다고 했을 때 세계가 무엇을 잃을까’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유명 아웃도어 브랜드 ‘파타고니아’의 창업주 이본 슈나드 회장은 지난달 이에스지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실천에 나섰다. 자신과 가족들이 가진 4조원 규모의 회사 지분을 기후변화와 환경 문제 대응에 쓰도록 기부한 것이다. 올해 83살 고령의 슈나드 회장은 지분을 기부한 뒤 <뉴욕 타임스>와 한 인터뷰에서 “나는 당장 내일도 죽을 수 있다. (하지만) 회사는 50년 동안 올바른 일을 계속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에스지(ESG)란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를 뜻하는 영어 단어의 앞글자를 딴 말로, 매출액이나 영업이익 같은 재무적 지표 외에 환경·사회·지배구조 같은 비재무적 지표를 고려해 지속가능성을 지향하는 기업 경영과 투자 활동이 필요하다는 개념이다
조해영 기자 hy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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