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먹과 붓이 된 듯 두려움 없는 화풍, 300년 시대를 뛰어넘다 [송주영의 맛있게 그림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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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유명한 예술작품도 나에게 의미가 없다면 텅 빈 감상에 그칩니다. 한 장의 그림이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맛있게 그림보기는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그림 이야기입니다. 미술교육자 송주영이 안내합니다.
언젠가 초등학생 아이들에게 팔대산인(八大山人)의 그림을 보여주면서 "언제 그린 그림일까" 물어본 적이 있다. 아이들의 대부분이 "요즘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다. 300년 전 그림이라고 알려주면 아이들뿐만 아니라 성인들도 놀라워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팔대산인의 작품들은 직관적으로 현대적인 느낌이 든다. 무려 300년 전, 팔대산인은 왜, 어떻게, 이러한 그림들을 그렸을까?
미친 스님이 된 멸망한 나라의 왕자님
1626년 중국 명나라 남쪽 장시성의 난창시에서 유달리 귀가 큰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큰 귀 때문에 “탑(耷)”이라고 불렸던 아이는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의 아들 주권의 9대손으로 왕족이라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그렇다고 황제가 되는 서열의 지위는 아니었고, 다만 교육·환경적으로 풍족한 지방의 상류층 도련님이었다. 주탑은 7세에 시를 지었고 11세에 산수화를 그렸던 소문난 영재였다. 15세에는 명나라 과거 시험에 높은 성적으로 합격했다. 그러나 전도유망한 소년 주탑의 평탄한 일상은 그가 18세 되던 해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1644년 이자성이 이끌던 반란 농민군에 베이징이 함락되었고, 혼란에 빠진 명나라의 황제는 목을 매 자결했다. 한 달 후 북방의 만주군이 권력을 장악하며 명은 청이 되었다. 청의 군대가 주탑이 살던 난창에도 쳐들어왔다. 청의 만주군은 항복하며 변발(머리 앞부분을 깎고 뒷부분을 길게 땋는 것)을 따르면 도성의 주민들을 살려주었지만, 저항하거나 변발을 하지 않을 경우 도성 안 사람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같은 해, 주탑의 아버지가 사망했다. 잇따라 1648년에는 주탑의 아내와 어린 아들도 세상을 떠났다. 조국을 잃고 아버지와 아내, 그리고 자식의 죽음까지 경험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그는 살아남기 위해 변발 대신 삭발을 선택했다. 그의 나이 22세였다. 똑똑했던 그는 누구보다도 빨리 불가의 지식을 습득하여 30세에는 오늘날의 주지승 위치에 올랐다. 그러다가 36세에 낡은 도교 사원을 개축하여 남동생과 함께 머물렀다. 명나라 말기는 유교 불교 도교를 융합하는 삼교합일이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불가 승려가 도가의 승려가 되는 일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40대 중반부터 지역의 지식인들, 심지어 청나라 관료들과 직접 만나 시와 그림을 나누는 모임을 자주 하면서 서서히 세상 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1674년 황안평이 그린 49세 주탑의 초상화, '개산소상'에는 여러 제발문(서화에 기록하는 감상문)과 자제시(직접 지어 쓴 시)가 있다. '개산'은 주탑의 승려명이다. 그는 이 초상화에 '장시성 녀왕의 후손임'을 스스로 밝히며 왕족의 인장까지 찍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678년 그 지역의 한 관료가 명나라 유민이 된 문인들을 자신의 집에 불러 머물게 했는데 청의 한족에 대한 회유책이었다. 주탑도 그 초청에 응해야만 했고 거의 감금에 가까운 시간을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자신의 초상화에는 왕족임을 밝혔지만 여전히 공식적으로 드러낼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자신의 본명과 신분을 드러낼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분노였을까, 아니면 감금생활을 벗어나기 위한 연극이었을까, 주탑은 심각한 발작을 일으켰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그가 갑자기 미쳐 날뛰며 웃다가, 울다가 자신의 옷을 찢어 태우고 길거리에서 춤을 추며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벙어리가 되었다. 그렇게 정신이 나가 있는 그를 조카가 집으로 데리고 가서 한동안 돌보았고 호전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주탑의 광기에 대해 학자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주탑의 할아버지 주다정은 특히 그림으로 유명했는데 갑자기 웃거나 우는 발작이 잦았다고 한다. 그리고 주탑의 아버지 주모관은 청각장애가 있었다. 필연적으로 주탑은 수화나 글로 소통하는 것에 익숙했을 것이다. 그가 종종 기이한 행동을 했던 것을 두고 가족 유전과 환경 때문이라고 보는 연구자들도 있다.
그런데 주탑의 정신적 공황 상태가 심했다던 1678년부터 1684년 사이에 그는 한 여인을 만나 결혼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정확히 언제, 어떤 여인과 결혼했고, 왜 헤어졌는지 명확하지 않다. 평생 팔대산인의 작품을 수집하고 연구했던 예일 대학의 왕펑유 교수는 "분명한 건, 이 시절 그의 결혼생활이 짧고 불행했다"면서, 그 근거로 1682년과 1684년 사이에 그린 그림의 자제시를 제시했다. 이 시기에 남긴 꽃 그림에 주탑은 "내가 대체 무슨 약속을 어겼단 말인가?" 하며 한탄하고 있는데, 이는 남녀의 불화로 보인다는 것이 왕펑유의 설명이다. 중국에서 2012년에 개봉한 영화 '팔대산인'에는 팔대산인의 초상화를 그린 황안평이 팔대산인의 아내라는 허구적 상상을 펼치기도 했다. 그만큼 그의 환속이 50대 후반에 겪은 개인적인 사건들과 관련 있다고 보는 연구들이 많다.
58세의 그는 처음으로 팔대산인이라는 서명을 사용했다. 팔대산인이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언어유희다. 한자 '八大山人'을 세로글씨로 흘려 쓰면 마치 운다는 뜻의 '哭之'나 웃는다는 뜻의 '笑之'로 보인다. 심지어 찡그리고 있는 사람 얼굴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자신의 본명을 숨기기 위해 평생 많은 이름을 암호처럼 사용했다. 그러나 환갑 이후부터 죽기 전까지 그가 남겼던 작품들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그를 팔대산인으로 기억하는 이유다. 인생 황혼기에 창작 불꽃을 지폈던 한 노인은 그렇게 전설이 되었다.
환갑의 나이에 화가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다
베이징 고궁박물원의 연구원 양신은 팔대산인의 예술을 다음과 같은 다섯 글자로 설명했다. "첫째 '적음(少)'이다. 배경에 사물이 적고, 붓의 획수도 적다. 공간 활용과 서예, 인장의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 예술가는 지금까지 그 누구도 없었다. 둘째, '원(圓)'이다. 서예와 회화를 결합했고, 말년에는 붓터치가 더욱 미묘하고 부드럽다. 셋째, '물(水)'이다. 붓이 머금은 물의 양을 조절하여 풍부하고 변화무쌍한 표현에 탁월하다. 넷째, '백(白)'이다. 여백 처리에 뛰어나며 전체 공간을 다양하게 분할한다. 마지막으로 '기이(奇)'하다. 물고기와 새의 눈을 비범하게 그리는데, 이는 재미있게 과장하면서 단순함 속에 깊은 생각을 담는 예술기법이다."
팔대산인은 대여섯 개의 선만으로 사물을 그리면서도 넓고 깊은 공간을 순간적으로 드러내는 탁월함이 있다. 특히 동물 그림에서 자주 보이는 “위로 치켜뜬 눈”은 불쾌감이나 분노를 뜻하는 백안(白眼)과 관련이 있다. 중국의 전통 연극에서 배우들이 눈을 위로 뜨는 것은 '분노'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러한 눈의 표현은 의도적이다. 형식적으로는 단순하고 간결한 구성이고, 내용적으로는 깊고 심오한 복잡함이 담겨 있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작품은 현대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60세의 팔대산인은 이후 15년 동안 여러 예술 실험들을 했다. 붓을 눕혀 쓰던 것에서 점점 똑바로 세우는 방식의 변화가 이때 일어난다. 붓을 똑바로 세우고 붓끝을 납작하게 잘라 사용하면서 팔대산인의 글씨는 오늘날의 붓펜으로 쓴 듯 가로세로 획의 두께가 일정해졌다. 1692년에 그린 꽃 그림에서 기법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의 카드나 엽서 디자인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에는 특이한 글자가 있다. 왼쪽의 꽃잎과 대칭적으로 배치된 글자 '섭사(涉事)'는 '어떤 일에 관여하다' 또는 더 나아가 '그림을 그리다'라는 뜻이다. 그는 유달리 “섭사”라는 문구를 자주 사용했다. 1693년의 '새와 물고기' 작품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팔대산인의 자제시가 있다. UCLA의 이휘슈 교수는 이를 다음과 같이 풀이하였다. "능숙을 위한 고군분투, 그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 끊임없이 산을 오르듯이, 글쓰기에 능숙해지기 위해서는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을 나는 감히 섭사라고 한다." 팔대산인은 두려움 없이 창작을 하기 위해서 스스로 먹과 붓이 되어 다양한 사물을 끊임없이 그리며 연습했던 것이다.
다시 기본으로 되돌아간 말년의 거장
67세의 팔대산인은 돌연 중국 전통 산수화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평생을 붓과 함께 살았던, 고수의 경지를 이미 넘어섰던 그였다. 10년 가까이 다양한 예술 실험을 했던 그는 왜 다시 고전으로 되돌아갔을까? 어쩌면 기초, 기본 또는 근본이라는 것, 그 중요성을 다시금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한다. 극단적인 수행과 파격적인 모험을 마친 승려가 환속하여 다시 세상으로 내려온 것과 같은 맥락이다. 약 3년 정도 산수화 수련을 마친 그는 1696년 '연꽃과 오리'를 그린다. 이 작품은 팔대산인 예술의 정점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래에서 위로 길게 오르며 서 있는 연꽃 줄기, 그리고 넓게 매달린 잎사귀에서 긴장감과 여유로움이 상반된 조화를 이루고 있고, 눈을 위로 치켜뜬 오리들의 불규칙한 배치는 인간적인 감정을 상징한다. 그의 나이 70세였다.
그즈음 팔대산인을 만났던 왕위안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팔대산인은 진정한 대가다. 다른 누구와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다. 그러나 그는 가난하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글씨와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1704년, 또 다른 지인이 그에게 보낸 편지에는 “4년 동안 소식이 없어서 걱정”이라는 대목이 있다. 74세가 된 이후부터 두문불출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동시대 화가 석도가 보낸 편지에는 "선생님께서 74, 75세에도 거침없이 등산하신다고 들었습니다"는 구절로 미루어 보아 팔대산인은 말년까지도 건강했던 것 같다.
눈물 같던 먹물은 흰 구름 되어 피어오르고
팔대산인의 말년 작품으로 여겨지는 부채 그림에는 적막한 산속 작은 움막만이 거의 보일 듯 말 듯 멀리 있다. 그가 다른 산수화에 직접 남긴 시, "산등성이에서 흰 구름이 피어오르고, 세속의 저속함은 티끌 만큼도 보이지 않는다”라던 읊조림이 느껴진다. 시대를 앞서 간 천재였지만 시대를 받아들이지 못한 광인의 삶을 살았던 팔대산인. 한때 “나의 그림에는 먹물보다 많은 눈물이 있다”고 고백했던 팔대산인. 그러나 마지막에는 피어오르는 흰 구름 속에 묻힌 채 자연의 일부가 되어 마침내 신선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송주영 미술 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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