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과 '헤어질 결심'… 클래식 음악 진화의 시작 [이지영의 클래식 노트]

2022. 11. 1. 04:3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편집자주
20여 년간 공연 기획과 음악에 대한 글쓰기를 해 온 이지영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이 클래식 음악 무대 옆에서의 경험과 무대 밑에서 느꼈던 감정을 독자 여러분에게 친구처럼 편안하게 전합니다.
첼리스트 한재민이 지난해 초 금호아트홀에서 열린 금호영재오프닝콘서트 무대에서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호흡을 맞추고 있다. 금호문화재단 제공

음악회는 어떤 연주자를 '보러' 가느냐가 중요할 때도 있지만 어떤 레퍼토리를 '들으러' 가느냐가 중요할 때도 있다. 연주자와 특정 레퍼토리 간의 조합을 고려해 음악회를 찾는 애호가들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유명한 이름과 익숙한 레퍼토리를 따라 공연장으로 향한다.

개런티가 높은 해외 연주자, 큰 규모의 예산으로 움직이는 대형 오케스트라 무대는 유명함과 레퍼토리 간 조합이 더 중요해진다. 객석 점유율, 티켓 판매율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유명 오케스트라가 익숙하지 않은 레퍼토리를 연주할 경우, 유명 협연자가 아쉬움을 채울 때가 많다. 최근 사이먼 래틀이 이끄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내한 무대 레퍼토리는 부담스러울 수 있는 브루크너 교향곡 7번이었지만 협연자는 피아니스트 조성진이었다. 총 3회 서울 공연의 티켓은 고가임에도 순식간에 매진됐다.

익숙함은 관객을 무대로 끌어오기도 하지만 밀어내기도 한다. 클래식 음악은 수백 년 전부터 연주돼 온 작곡가의 작품을 다시 꺼내어 연주하고 듣는 일이다. 수없이 들어 이미 잘 알고 있는 작품을 다양한 연주자의 해석으로 감상하는 일이지만 당연하고 익숙하게 받아들인 이 패턴은 새로운 곡을 듣는 일은 물론 새로운 해석을 듣는 일에 불편함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얼마 전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은 유튜브 채널 '클럽발코니쇼'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세상은 때때로 변화에 느리게 반응하고,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똑같은 것만 계속 듣고 싶어 한다. 매번 브람스, 베토벤 교향곡만 듣고 연주하다 보니 우리가 예술을 더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내향적으로 쪼그라들게 하는 것 같다. 예술은 항상 진화해야 하는데 우려스럽다. 이것은 진화가 아니라 퇴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취향 차이겠지만 누군가는 고전과 낭만에 한정된 콘서트 레퍼토리를 보며 클래식 음악의 지루함을 얘기한다. 명작으로 검증되지 않은 최근 작품에는 관심이 없고 축적된 고전음악 지식을 나누는 것에 대해 고루하다며 밀어내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클래식 음악을 '쿨하다' 생각해서 접하기 시작한 이들 중에는 연주자의 해석 범위가 넓은 바로크 음악과 수많은 실험과 질문을 던지며 현재와 끊임없이 소통하는 오늘날의 음악에서 더 큰 의미를 찾기도 한다.

피아니스트 비킹구르 올라프손의 최근 앨범 '먼 곳으로부터(From Afar)'. 유니버설뮤직 제공

도이치 그라모폰과 전속계약을 맺고 확실한 팬을 늘려 가고 있는 피아니스트 비킹구르 올라프손의 인기와 평단의 극찬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올라프손의 디스코그라피는 한 작곡가의 작품을 조망하더라도 시대를 뒤섞어 엮어내는 자유로움과 재미가 있다. '필립 글래스(2017)', '바흐(2018)', '바흐 리워크(2019)', '드뷔시-라모(2020)', '모차르트(2021)', '리플렉션(2021)', '먼 곳으로부터(From Afar·2022)' 등은 여러 면에서 이색적이다. 모차르트를 다룰 때에도 작곡가와 동시대 인물들의 작품을 함께 다뤄 시대의 흐름을 맛보게 했고, 18세기 라모와 20세기 드뷔시의 작품을 교차 구성한 드뷔시-라모 앨범은 21세기에 '라모 앓이'를 만들어낸 수작이 됐다. 바흐, 모차르트, 슈만, 브람스, 바르톡, 쿠르탁, 아데스 등의 작품을 담은 ‘먼 곳으로부터’는 클래식과 우리 시대가 하나의 이야기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사려 깊게, 꽤 선명하게 구성해냈다. 음악적 흐름만 따라가다 보면 익숙했던 작품이 더는 지루하지 않고 현대 작품이 더는 낯설지 않은 것이다.

얼마 전 첼리스트 한재민의 리사이틀에 다녀왔다. 아직 16세지만 세계적 콩쿠르 우승, 세계적 매니지먼트와의 계약 뉴스보다 더 굵직하게 각인된 것은 그의 레퍼토리 구성 능력이다. 흔히 바흐, 베토벤, 브람스를 첼로 명곡 작곡가로 거론하지만 이 악기의 명곡은 수적으로 20세기에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날 공연도 1부에는 바흐, 윤이상, 리게티의 무반주곡을, 2부에는 윤이상, 브람스의 피아노 듀오 작품을 배치해 바흐와 브람스가 20세기 작품들과 어떤 흐름 안에서 엮이는지, 연주자만의 스토리텔링을 만들었다. 공연이 끝난 후 윤이상과 리게티의 첼로곡을 찾게 됐다. 훌륭한 연주자의 역할은 잘 아는 곡을 잘 연주해 줄 때도 좋겠지만 새로운 음악의 지경을 보여주고 감상의 영역을 확장시켜줬을 때인 것 같다. 그 범위가 넓어질수록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객원기자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