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고] 자식을 먼저 보낸 아비로서 슬픔을 나누고 싶습니다

강상중 도쿄대 명예교수 2022. 11. 1.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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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희와 축제의 공간이 아비규환의 지옥도(地獄圖)로 돌변할 것을 누가 예상했겠습니까. 원인 규명이나 재발 방지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유족들에게 그러한 객관적인 말은 허무하다고밖에 들리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슬픔을 견딜 수 있을까요.

저도 말씀드리기 힘든 경험을 겪었습니다. 목숨과 바꾸더라도 지키고 싶었던 사랑하는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그때 구약 성경의 ‘의인 욥’처럼 외쳤습니다. “어찌하여 내가 (내 어머니의) 태(胎)에서 나왔을 때 숨이 끊이지 않았는가.”(’욥기’ 제3장 11절)

아들은 우리 부부 삶의 버팀목이자 기쁨과 행복의 원천이었습니다. 그 생명의 물이 갑자기 말라 지상에서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지위가 높고 명예와 부(富)를 갖췄더라도 사랑하는 아이를 잃은 부모만큼 슬프고 애절하며 비참한 존재는 없다고. 이태원 비극으로 속수무책인 부모님들의 통곡은 우리 부부와도 같을 겁니다. 지금은 오로지 참담해하고 슬퍼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눈물로 날이 저물고 슬픔에 넋을 잃습니다.

다만 우리의 경우, 아들은 메시지를 남겨주었습니다. 스스로를 이 지상으로부터 ‘퇴출’할 때 남긴 메시지, “(부모님은) 오래 오래 건강하게.” 이 말에 우리 부부는 “오랫동안 건강하게 사는” 것이 아들의 사랑에 보답하는 유일한 응답이라고 믿고 10 년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세월이 흘렀는데도 슬픔은 가시지 않고 오히려 먹먹하기만 합니다.

이태원 비극으로 목숨을 잃은 아들·딸들은 부모에게 메시지조차 남기지 않고, 홀연히 떠나고 말았습니다. 남겨진 부모의 상실감은 한없이 깊은 어둠 속에 빠진 것만 같을 겁니다. 이 비극에 대해 “왜, 누구 때문에?”라는 답을 어디에서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본어에는 부전감(不全感)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무엇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완전하지 않은 감각이라는 뜻이죠. 그것이 8 년 전 ‘세월호 침몰 사고’와의 결정적인 차이가 아닐까 합니다. 참사의 원인이나 책임져야 할 대상이 명확하지 않고, 따라서 슬픔이 분노로 전환되고 때로는 증오로 변해가는 과정이 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부부의 경우, 아이의 죽음은 부부의 사랑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으며 저는 그 슬픔을 글로 쓰면서 어느 정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태원 참사의 부모들은 어떨까요. 우리의 경우 아들의 죽음은 어디까지나 가족이라는 개인적 비극에 머물렀습니다. 반면 이태원 비극의 부모들은 엄청난 수의 희생자와 함께 슬픔을 나눌 겁니다. 비탄은 각자의 것이며 결코 똑같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태원의 비극에선 비탄, 즉 슬픔을 나누는 연대감이 형성될 수 있습니다. 지금 부모들은 각각의 슬픔 속으로 가라앉고 있지만, 슬픔을 서로 나누고 공유할 때, 비록 치유되지는 않더라도 위로하고 격려하고 복원해 나가는 힘이 되살아나지 않을까 합니다.

생을 잃은 젊은이들은 인생의 사계절을 모르는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저는 불의의 죽음일지라도 그 짧은 인생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아들은 서른이 되기 전에 떠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들 나름의 삶의 사계절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저는 자식을 잃고 ‘죽은 자식의 나이를 아직도 세고 있는’ 부모의 후회에서 조금은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그저 뉘우치기만 하는 아비가 아닐 수 있었습니다.

지금 비탄에 잠긴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신(神)조차도 바꿀 수 없는 ‘과거’가 있고 과거만은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가버린 아이들이 남겨준 ‘과거’는 남겨진 사람들 안에서 계속 살아갑니다. 그 살아있는 ‘과거’를 정중히 위로하고 슬픔의 유대를 통해 나눌 수 있다면 비극은 비극으로만 끝나지 않을 겁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에게 위로의 말은 공허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굳이 전하고 싶습니다, “부디 오래도록 살아주세요”라고. 여러분의 아이들이 부모님들에게 메시지를 남긴다면, 분명 그렇게 쓸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강상중 도쿄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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