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광 패널로 사라지는 농장… 이 가족이 수확한 ‘마지막 복숭아’
비전문 배우들을 대거 기용하고, 일부 장면에서는 대본 없는 즉흥 연기를 시도하며, 스페인 카탈루냐어(語)를 사용하는 방식까지. 3일 개봉하는 스페인 영화 ‘알카라스의 여름’은 전통적인 영화 문법에서 스스로 한발 비켜서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런 생소함은 영화에서 미처 예기치 못했던 효과를 자아낸다. 사실에 기반한 다큐멘터리와 허구적 극 영화 사이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이다. 사전(事前) 연출된 장면들을 보면 극 영화가 분명하지만, 이야기 구조나 연기의 넉넉한 여백은 전원 생활을 담은 기록 영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난 2월 베를린 영화제 최고상인 ‘황금 곰상’ 수상작. 당시 심사위원장이었던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은 “아역부터 80대까지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 가족들의 따스함과 유머뿐 아니라 투쟁까지 보여주는 능력, 인간과 깊이 연결된 대지(大地)에 대한 배반까지 모두 드러낸 점”을 선정 사유로 꼽았다. 샤말란 감독의 마지막 말처럼 영화에서 극적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태양광 패널이라는 점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제목인 알카라스는 스페인 카탈루냐의 농촌 마을 이름. 여기서 대대로 복숭아 농장을 일구면서 3대가 모여 살던 대가족은 여름 수확을 끝으로 삶의 터전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복숭아 나무를 모조리 베어내고 태양광 패널을 짓겠다는 땅 주인의 계획 때문이다. 결국 이들 가족은 “여름이 끝나면 집을 비워 달라”는 최후통첩을 받는다. 친환경적 발전(發電)이라는 명분이 도리어 자연 파괴의 이율배반을 일으키는 셈이다. 하지만 영화는 직접적인 고발의 사회물이라기보다는 우회적으로 넌지시 묘사하는 방식을 택한다.
대신 영화는 땀 흘려 가꾼 것들의 소중함에 대한 예찬으로 가득하다. 온 가족이 둘러앉는 식사부터 여름철 수확과 마을 잔치까지 일상적 풍경들도 공들여 찍는다. 지극히 서정적이고 전원적인데도 줄곧 애잔함을 자아내는 것은 화면 속 풍경들이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는 비극적 예감 때문이다. 실제로 스페인 여성 감독인 카를라 시몬은 유년 시절 삼촌들이 복숭아를 재배했던 알카라스에서 여름과 겨울을 보냈다고 회고했다.
전통적 신토불이(身土不二)와 국적 없는 세계화는 영화에서 계속 충돌을 일으킨다. 어디에서도 호소할 길을 찾지 못한 주인공 가족들은 결국 애써 가꾼 복숭아를 대형 마트 유리창에 던지는 방식으로 울분을 표출한다. 예상을 뛰어넘는 반전이나 파국은 없지만, 거친 선동 구호의 정치극이나 값싼 신파극보다 훨씬 깊은 공감과 연민을 자아낸다. 내년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 후보작에도 이름을 올렸다. 한국 대표인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 등과도 경쟁을 펼치게 된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