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지 않아요!” 비정한 세상 향한 소녀의 강펀치
객석에 앉으면 알파벳 블록들을 쌓아놓은 것 같은 무대가 시야를 압도한다. 거대한 책장도 보인다. 책은 ‘마틸다’의 세계를 지탱하는 벽돌과 같다. 저렇게 무질서하게 흩어진 알파벳들이 모여 어떤 이야기를 축조할까 상상하는 순간 생일 축하 파티 장면으로 뮤지컬이 시작된다.
모든 탄생은 기적이다. 당연한 문장을 구태여 노래로 들려주는 까닭은 아이들이 어떤 존재라는 것을 우리가 종종 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여주인공 마틸다가 집에서 처한 상황은 험악하기 짝이 없다. 엄마는 말한다. “여보 큰일 났어. 쟤, 책 읽어!” 아빠가 거든다. “꼴값 떨지 말고 TV나 봐!” 자신을 불량품이라 부르는 부모 밑에서 마틸다는 외롭다. 하지만 이 소녀, 물러서지 않는다.
도서관으로 책 속으로 도피한 마틸다는 그 이야기의 힘으로 세상과 맞선다. 구박받는 마틸다가 부당함과 싸우겠다고 다짐하며 부르는 노래 ‘똘끼(Naughty)’는 “불공평하고 또 부당할 때/ 한숨 쉬며 견디는 건 답이 아냐/ 꾹꾹 참고 또 참으면 보나 마나/ 날 잡아 잡수라고 다 포기하는 건/ 옳지 않아 옳지가 않아~”로 흘러간다. “옳지 않아요!”는 이 뮤지컬에서 후렴구처럼 반복되는 대사다.
‘마틸다’는 영국 로열셰익스피어컴퍼니(RSC)가 ‘레 미제라블’ 이후 25년 만에 만든 뮤지컬. 원작자 로알드 달을 비롯해 제작진은 이야기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마틸다의 부모가 책을 혐오한다고 설정했다. 거꾸로 말하기다. 2012년 올리비에상 7관왕, 2013년 토니상 4관왕을 차지한 이 뮤지컬이 2018년 한국 초연 후 4년 만에 서울에서 공연 중이다. 아이 손을 잡고 온 가족 관객이 많이 보였다.
‘마틸다’에서는 학교도 차갑고 으스스한 공간이다. 교문 쇠창살 사이사이에 알파벳 블록을 끼우며 부르는 노래 ‘스쿨송’은 블랙 유머처럼 재미있으면서 씁쓸하다. 해머던지기 선수 출신인 교장은 섬뜩하고 만화적으로 과장돼 있다. 마틸다와 아이들은 괴물 같은 집과 학교에 “옳지 않아!”라고 외치며 싸운다. 객석으로 자주 등·퇴장하는 배우들은 넌지시 ‘우리 현실도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다.
‘마틸다’는 이야기를 사랑하는 소녀가 비정한 세상을 향해 날리는 펀치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왜 시키는 대로, 쓰인 대로 살아야 하지? 복수에 관한 책을 읽으며 마틸다는 용기를 낸다. 2막에서 객석 위까지 날아드는 긴 그네를 타며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 ‘어른이 되면(When I Grow Up)’은 창의적 안무가 반짝이는 명장면이다. “어른이 되면 온종일 뒹굴대며 놀 거야/ 다 괜찮겠지 어른이니까~”를 들으며 어른은 낯이 뜨거워진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처럼 아역 배우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 작품은 어두운 불안감을 밝은 판타지로 바꾸어 준다. 키 130㎝ 안팎의 소녀가 성인 배우도 어려워하는 긴 독백과 또렷한 발성, 다양한 안무를 소화해야 한다. 이번 공연에서는 임하윤(9), 진연우(11), 최은영(10), 하신비(9)가 몸집은 작아도 누구보다 용감한 마틸다를 번갈아 연기하고 있다. 후반부에서 극점을 찍는 노래 ‘리볼팅 칠드런(Revolting Children)’은 배우들의 칼군무로 박수를 받았다. 일부 대사가 객석까지 제대로 들리지 않는 게 옥에 티다.
최재림, 방진의, 최정원 등이 출연한다. 관객 평점은 10점 만점에 9.5점. 예매자는 40대(31.5%)가 가장 많고 20대(31%), 30대(28.2%) 순이며 여성이 87%를 차지한다. 공연은 내년 2월까지 신도림역 대성디큐브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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