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동맹 위해 평생 헌신한 삶… 남편 따라 잠들다

김은중 기자 2022. 11. 1. 03:0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애널리 웨버 여사 별세
지난 7월 미국 메릴랜드 프레더릭타운의 자택 앞에 서 있는 애널리 웨버 여사의 모습. /국가보훈처

6·25 전쟁 영웅 고(故) 윌리엄 웨버 미 예비역 육군 대령의 부인 애널리 웨버(79) 여사가 30일(현지 시각) 미 메릴랜드주 프레드릭의 자택에서 별세했다. 폐암 투병을 하던 그가 올해 4월 웨버 대령이 97세 나이로 세상을 뜬 지 6개월 만에 남편 곁으로 떠난 것이다.

애널리 여사는 1943년 1월 독일에서 태어났다. 1968년부터 1999년까지 미 연방 의회(하원)에서 행정담당 직원으로 일했는데, 1974년 웨버 대령과 만나 결혼했다. 웨버 대령은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 공수 낙하산 부대 장교로 참전,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수류탄·박격포탄 공격을 받아 오른쪽 팔과 다리를 잃었다.

1980년 웨버 대령이 전역 후 한국전 참전용사기념재단 회장을 맡으면서 애널리 여사는 남편을 도와 미국에서 6·25 전쟁을 알리는 활동을 해왔다. 부부는 워싱턴DC의 한국전 참전 기념공원 내에 미군과 한국군 지원부대 전사자 4만3000명의 이름이 새겨진 ‘추모의 벽’ 건립을 주도하는 등 ‘잊힌 전쟁’ 취급을 받던 6·25를 재조명하는 데 여생을 바쳤다. 애널리 여사는 자신의 이력서에 “한국 전쟁 전문가(Expert about the Korean War)”라고 표현할 정도로 자부심이 컸다고 한다.

웨버 대령이 올해 4월 작고하면서 7월 열린 추모의 벽 준공식에 부부가 나란히 참석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휠체어를 탄 애널리 여사가 현장을 찾아 “죽기 전 추모의 벽 현장을 직접 가보고 싶다”는 웨버 대령의 생전 유언을 따랐다. 애널리 여사는 6월 미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열린 웨버 대령의 안장식(安葬式)에서는 “남편은 원하던 바를 이뤘고 하늘에서 웃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또 7월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이 자택을 방문했을 때는 “한국을 사랑했던 남편의 유품은 한국에서 더 의미가 있을 것 같다”며 웨버 대령의 유품을 기증했다. 애널리 여사는 “전쟁을 극복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선도하는 국가로 발돋움한 한국이 다시는 같은 비극을 겪지 않도록 미래의 아이들에게 한국전쟁의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알려줘야 한다”고 했다.

웨버 대령 사후 한미동맹재단(이사장 정승조 전 합동참모본부 의장)이 유족과 협의해 ‘윌리엄 E. 웨버 대령 한미동맹상’ 제정을 결정했다. 애널리 여사는 지난주 시상을 위해 한국을 방문할 계획이었지만 병세가 악화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조태용 주미 한국대사는 31일 “한미동맹을 위한 애널리 여사의 희생과 헌신에 깊은 애도를 표한다”며 “정성을 다해 고인의 마지막 길을 예우할 것”이라고 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