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이현세’ 나온다… “만화가 死後에도 신작 가능해”
“내가 죽어도 내 만화가 계속 생산된다면 이야말로 영생 아닌가.”
유명 만화가 이현세(66)씨가 ‘인공지능 이현세’ 개발에 뛰어든 이유다. ‘공포의 외인구단’ ‘아마게돈’ 등 지난 44년간 창작한 4174권 분량 만화책을 컴퓨터에 학습시켜 작가 특유의 그림체를 구사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젝트다. 이씨는 본지 통화에서 “최첨단의 미래가 솔직히 끔찍하고 두렵긴 하지만 흥미롭기도 하다”고 말했다. “종이 만화 시절에는 배경 효과를 오려 붙이는 스크린톤이 나왔고 웹툰 시장이 열리자 또 다른 기기와 기능이 등장했다”며 “결국 인공지능 역시 작가를 위한 창작 도구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씨는 지난 27일 만화기획사 재담미디어 측과 관련 협약식을 체결했다.
현역 만화가가 AI 제작에 뛰어든 첫 사례로, 향후 지각변동을 예고한다. AI가 그저 작가의 과거 그림체를 재현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변화할 미래의 작풍까지 예측해 그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씨는 “작가의 나이나 관점의 변화에 따라 만화도 영향을 받는데 내 경우 10년에 한 번꼴로 그림체가 바뀌었다고 하더라”며 “100년 뒤에도 ‘이현세가 살아 있었다면 이런 식으로 그렸겠지’ 로봇이 판단해 만화를 완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재담미디어 측은 “내년 하반기면 AI가 그려낸 첫 ‘이현세 신작’이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AI가 그렸지만 저작권은 작가에게 귀속되고, 사업권만 이현세·만화기획사·AI 개발사가 나눠 갖는다.
만화계는 AI와 빠르게 결탁하고 있다. 시장이 커지며 증가한 수요를 만족시킬 수 있는 생산성을 위해서다. 국내 최대 웹툰 플랫폼 네이버웹툰은 지난해 ‘웹툰 AI 페인터’ 시스템을 도입했다. 컴퓨터가 약 30만장의 이미지를 통해 얼굴·신체·배경 등 부위별 특징과 색상 스타일을 학습, 스케치 위에 클릭만 하면 알아서 자연스러운 색을 입혀주는 것이다. 웹툰 ‘이두나!’ 122화 일부 컷에 이 기술이 적용됐는데, 민송아 작가는 마우스 클릭 두 번 만에 채색이 끝난 그림을 올리며 “(기계에게) 인류는 졌어”라는 장난스러운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 네이버 측은 지난 2월 ‘웹툰 AI’ 조직을 별도 마련했고, 최근엔 채색뿐 아니라 ‘오토 드로잉’ 단계로도 나아가고 있다.
만화계의 고질적 병폐는 작가의 육체적 부담이었다. 고강도 수작업이기 때문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 ‘2021 웹툰 작가 실태조사’에 따르면, 710명의 작가가 웹툰 창작 시 겪는 어려움으로 ‘마감 부담으로 인한 휴식 시간 부족’(85.4%) ‘과도한 작업으로 인한 정신·육체적 건강 악화’(85.1%)를 꼽았다. 지난 7월 웹툰협회는 “업계가 형성해 온 살인적인 업무 환경은 엄연한 현실”이며 “과도한 작업량을 멈추지 않는 한 이 순간에도 웹툰 작가는 죽어가고 있다”는 내용의 성명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AI가 이 같은 부담을 상당 부분 해결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은 2024년 완성을 목표로 지난해부터 웹툰 자동 생성 기술 ‘딥툰’을 개발 중이다. 작가가 줄거리와 스케치만 해놓고, 나머지는 AI가 처리하는 것이다. 연구원 측은 “민간 업체 등의 사용으로 기능이 더 개선되면 상용화로 이어질 것”이라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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