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MZ포퓰리즘과 찐꼰대 그리고 진혼

기자 2022. 11. 1.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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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무겁다. 꽃다운 이들이 스러졌다. 교단의 일원으로서 유구무언일 따름이다. 자식을 키우고 있는 부모로서는 피눈물이 날 지경이다. 억울한 젊은 영혼들 앞에 마뜩한 진혼도 떠오르지 않는다.

이정철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한때 젊은이들 사이에 ‘헬조선’이라는 얘기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경제는 효율성만 좇아 양극화되었고 정치는 깃털같이 가벼웠으며 안보는 충돌 전야를 방불케 했다. 다행스럽게 당시의 젊은이들은 ‘헬조선’이라는 난파선을 탈출하기보다는 부서진 함선을 직접 개조하는 위대한 여정에 나섰다. 촛불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광장정치는 갈피를 잡지 못하는 권부의 무책임성에 대한 조건 반사로 시작해, 정치·경제·안보 상황이 직면한 총체적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직접정치로 진화했다.

‘촛불혁명의 위임권력’임을 자처한 문재인 정부 5년의 실험은 그러나 세 가지 오류를 극복하지 못하고 스러졌다. 각각 무능력과 불공정 그리고 위선으로 상징되는 부동산 문제, 조국 사태 그리고 잇따른 성추문이 그것들이다.

문재인 정부 초기 부동산 문제는 강남 현상이자 비강남 지역의 상대적 빈곤감의 문제로 비추어졌다. ‘강남 잡자고 초가삼간을 다 태운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로 정부가 강남 잡기에만 열중한 이유이다. 조국 사태는 야망을 지닌 정치 검찰과 검수완박을 시도한 신권력의 자존심 싸움으로 시작했지만, 결과적으로 촛불정부의 도덕성은 쇠락했고 대안적 직접정치의 출현을 초래했다. 입시 불공정에 주목한 젊은이들의 직접 저항은 세대 연합을 자처하는 이른바 태극기 세력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잇따른 미투 사건들은 직접정치로 깨어난 젠더의식이 단죄한 구태였다. 역사 투쟁의 정당성이라는 포장에 파묻혀 있던 농양들이 터져 나올 때의 충격과 파장은 실로 엄청났다. 촛불정부의 위선을 향해 터져 나온 분노는 진영 논리를 수용하지 않았다. 세 가지 문제는 젊은이들이 마음을 돌리게 된 결정적 계기로 기능했고 촛불정부는 끝내 청년들의 마음을 되사지 못한 채 임기를 마감했다.

새 정부 역시 여의도 정치보다는 광장정치 즉 직접정치를 선호하는 인상이다. 정보의 소비자였던 시민들이 정보의 생산자로 변모해가면서 직접정치는 시대의 대세가 되어가고 있고 이미 대의정치를 압도하고 있다. 시민들이 생산한 정보는 구체적이지만 파편화되어 가면서 다양한 정체성 정치의 출현을 목도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의정치의 상징인 여의도 정치와 타협하지 않는 것은 스마트한 것처럼 보이게 마련이다. 새 대통령은 낡은 정당정치와 부패한(?) 여의도 정치로 대표되는 대의정치에 포획되고 싶지 않다는 의지를 공공연히 드러냈다. 여의도 정치를 폄훼하고 국회와 맞서는 모습을 빈번히 연출하는 새 정부 주요 각료들도, 자신은 국민에게만 부채가 있다는 대통령과 이념적 동지라 할 만하다.

대체로 이념적 선도성이나 피박해자의 구도적 실천을 강조하는 정치세력은 근본주의를 선호하게 마련이다. 이 점에서 검수완박의 피해자임을 강조하는 현 정부 중심 세력들이 섣부른 협치보다는 직접정치와 근본주의적 접근법을 선호하는 것은 당연한 경향이다. 실제 ‘2말 3초 박스권 지지율’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대통령의 선언은 근본 개혁주의자의 면모를 드러낸다. 하지만 근본주의 ‘선언’은 실력의 시간대로 진입하고 있다. 경제 위기가 닥쳤고 글로벌 경제침체는 파이가 커져야 가능한 공정 담론을 꺼내지도 못하게 하고 있다. 미투는 사라지고 스타일리시한 마초들이 득세하는 양상이다. 취임 6개월 허니문을 끝내고 있는 새 정부로서는 이 어려운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을 보일 때가 되었다.

직접정치의 주인은 미래 세대들이다. 그들이 헬조선을 외칠 때 대통령은 탄핵되었고 그들이 불공정과 위선을 외칠 때 정권은 교체되었다. 물론 젊은이들이 요구하는 공정이 모두 현실 가능한 것도 아니요, 그들이 요구하는 미투가 단번에 해소되기도 어려운 과제이며 그들의 요구가 즉자적이어서 허위의식일 수도 있다. MZ포퓰리즘을 경계하고 때로는 용기를 내어(?) 젊은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러가는 세대가 미래 세대에게 매표를 위해 던진 약속을 뒤집어서는 안 되고, 그들의 부채로 배를 채우며 88만원 세대를 재생산하는 찐꼰대 노릇은 더더욱 안 될 일이다.

광장정치의 시대에 직접정치의 주역들을 좌절시키지 말 것! 그것은 어떤 정치전략보다도 소중한 대한민국호의 미래 공약(commitment)이다. 미래는 쓰고 버리는 과거의 나룻배가 아니다. 젊은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진혼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정철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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