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페레스, 각료 반대에도 원전 도입… 이스라엘 핵기술 보유국 만들었다

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 2022. 11. 1.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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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47] 영원한 리더 시몬 페레스 [下]

시몬 페레스는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침공하기 위해 1955년 체코슬로바키아와 소련으로부터 대량의 무기를 구입한 사실을 알았다. 무기 조달 책임자인 시몬은 조국을 방어하기 위해 서방세계의 대이스라엘 무기 수출 금지에 맞서 필사적으로 군사 동맹국을 찾아 나섰다. 그는 당시 알제리와 전쟁 중인 프랑스를 눈여겨보았다. 프랑스는 알제리를 지원하는 이집트와 반목 관계였기 때문에 서로 말이 통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시몬은 혼자 프랑스로 날아가 집권당 인사들과 야당 대표를 만나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당시 프랑스는 서방세계의 대이스라엘 무기 수출 금지에 합의한 상태라 공개적으로 이스라엘을 도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시몬은 프랑스 수뇌부의 마음을 움직여 결국 비밀리에 프랑스 무기 구입에 성공했다. 이집트가 1956년 7월 프랑스와 영국이 관리하는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전격 선언하고 점령해버려 전운이 감돌자 이스라엘의 선제공격으로 이집트와 2차 중동전쟁을 치러 승리했다.

시몬은 전쟁에서 이기는 게 능사가 아니라 전쟁을 원천적으로 막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이 절대적 군사 강국이 되어야 했다. 그는 어렵게 프랑스와 원자력 기술 도입 협상에 성공했다. 그러나 막상 이스라엘 각료들이 모두 이 계획이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며 반대해 예산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시몬은 혼자서라도 원전을 짓겠다는 각오로 미국에서 공부할 때 쌓은 유대계 인맥들에게 호소하여 일단 건설 자금의 절반을 마련했다. 그리고 과학자들로 팀을 꾸려 일을 밀어붙여 마침내 이스라엘을 원전과 핵기술 보유국으로 만들었다. 1963년 민간자본으로 ‘시몬 페레스 네게브 원자력연구센터’라 불리는 원전을 완공했다. 원전은 강우량이 워낙 모자라 바닷물을 민물로 바꾸어 농사짓고 식수로 쓰는 해수 담수화 공장의 전력 공급원이 되었다. 그 뒤 외형적으로는 핵 보유 여부를 시인도 부인도 않는 ‘핵 모호성’을 유지하며 ‘전쟁 억지력’을 확보했다.

1985년 총리로 재직 중이던 시몬 페레스가 전투기 격납고로 시찰을 나와 조종석에 직접 탑승해 설명을 듣고 있다. /페레스센터

시몬은 1963년 바이츠만 연구소가 만든 컴퓨터를 보자 이 놀라운 기계가 군대에 꼭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시몬은 며칠간 달라붙어 컴퓨터 기술자들로부터 작동법과 쓰임새에 대해 배웠다. 컴퓨터 도입에 대해 군부는 반대했다. 장군들은 도대체 컴퓨터로 무얼 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시몬은 컴퓨터를 처음에는 전투준비 향상하는 데 썼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첨단 무기체계를 개발하는 데 요긴하게 사용했다. 1973년 4차 중동전쟁이 끝나자 이제 재래식 무기는 현대전에 더 이상 합당치 않다는 사실을 군부도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군에 중앙 컴퓨터 처리부대 ‘맘람’이 창설되었고, 정보부대 ‘8200′은 사이버 보안부대로 특화되었다. 그리고 1979년 영재들을 모아 IT 장교로 탈바꿈시키는 ‘탈피오트’가 창설됐다. 이후 컴퓨터와 인터넷 그리고 위성들로 운용되는 드론과 무인항공기 그리고 미사일 방어시스템 ‘아이언돔’이 이스라엘 군의 주력 무기체계가 되었다. 그 결과 이스라엘 스타트업들은 주로 IT와 방산 분야에 근무했던 군인들이 전역 후 창업한 사례가 대부분이다. 그만큼 군대의 수준 높은 IT와 방산 기술이 이스라엘 하이테크 산업의 원천이다.

1948년에 건국된 이스라엘은 탄생 자체가 집단농장(키부츠) 중심의 사회주의 국가로 출발했다. 유대인은 고대로부터 ‘능력껏 벌어 필요에 따라 나누어 쓴다’는 사상을 갖고 살았다. 이는 2000년 이상의 디아스포라 방랑 생활에서 살아남기 위한 공동체의 생활 수칙이었다. 이러한 사상을 이어받아 설립된 이스라엘의 키부츠는 생산시설의 공유와 배급 생활로 이루어졌다. 공산주의 방식에 가까웠다. 정부 역시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주도자이자 통화정책 결정자였다. 1980년대 들어 세계화 물결 속에 글로벌 경제에 편입되자 더 이상 계획경제가 먹혀들지 않았다. 시몬이 총리가 되던 해인 1984년 인플레이션이 무려 400%까지 치솟았다.

그는 이스라엘의 경제 체제와 체질을 전면 개혁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우선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미국으로 날아가 대규모 차관을 이끌어냈다. 이후 사회주의에 자본주의를 접목시키기 위해 시장경제를 도입해 대규모 구조조정 계획을 수립했다. 특히 노동당 당수인 시몬은 자신의 지지 기반인 노동자들에게 임금 동결 등 큰 고통 분담을 요구했다. 노사 양측의 반발이 컸다. 시몬은 노동조합, 고용주연합, 경제학자들과 재무장관을 불러 모아 ‘노사정 위원회’를 만들어 협상을 계속했다. 시몬은 정부가 먼저 뼈를 깎는 솔선수범을 보여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는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해 ‘24시간 끝장 토론’으로 각 부처 예산을 삭감한 ‘경제 회생계획’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노동조합이 물러서지 않았다. 시몬은 이들과 2주간 협상 끝에 마침내 노사정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후 1985년 말 인플레이션은 기적처럼 1.5%로 떨어졌다. 지도자의 집념과 헌신이 얼마나 중요한지, 진정한 리더십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준 역사적 업적이었다.

이스라엘은 인구 934만, 경상도 크기의, 석유도 자원도 거의 없는 나라다. 그러기에 눈을 밖으로 돌려 세계 시장을 겨냥한 창업이 매우 중요했다. 시몬은 이스라엘을 창업 천국으로 만드는 데 힘을 쏟았다. 그는 군대의 IT와 방산 기술을 활용해 특유의 ‘군산학’ 연계 모델을 만들어냈다. 그 뒤 시몬은 이스라엘에 벤처 캐피털 제도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1992년 외무장관 시절 주요국들을 방문하여 투자 유치 특히 벤처투자 유치에 열을 올려 세계 유명 벤처펀드들이 이스라엘에 사무소를 열기 시작했다. 이듬해 정부의 창업지원 프로그램 ‘요즈마 펀드’가 만들어졌다. 이른바 ‘Fund of funds’(모태펀드)다. 요즈마 펀드가 외국 벤처펀드들에 투자하고 이들이 이스라엘 벤처기업들에 투자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실질적인 투자 금액을 10배 이상으로 늘렸다. 이로써 벤처 캐피털 황무지였던 이스라엘에 벤처 캐피털 혁명을 일으켰다. 정부는 ‘청년들이여 도전하라, 책임은 정부가 진다’는 자세로 창업을 지원했다.

2007년 대통령에 선출된 시몬은 재임 8년 동안 젊은이들에게 창의와 상상력을 갖고 창업에 도전하도록 꿈을 심어주었다. 그 결과 대학 졸업생 40%가 창업에 도전해 1인당 창업 비율이 세계 1위이다. 7000개가 넘는 스타트업이 활동 중이며 기업가치 1조원이 넘는 유니콘만 30개다. 글로벌 대기업 400여 개사의 R&D센터가 들어와 스타트업을 사냥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스타트업 100여 개가 나스닥에 상장되어 미국, 중국에 이어 3위이다. 글로벌 대기업 하나 없이 1인당 GDP가 5만5000달러(IMF 2022)가 넘는 강소국이 되었다.

시몬은 “인생의 참된 교훈은, 삶은 너무나 짧기 때문에 비관주의나 환멸이나 분노에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생은 그처럼 짧은 것이니 그것을 가시로 보지 말고 꽃인 양 바라보라. 거기에는 맛과 향기와 형태가 있다. 나는 삶이 언제나 나를 혹독하게 다룬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감사할 뿐 불평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 그는 많은 위대한 업적들을 남겼음에도 “유일하게 후회하는 것은 더 큰 꿈을 꾸지 않았던 것”이라고 말년에 회고했다.

아라파트와 오슬로 평화협정을 체결하다

1993년 당시 이스라엘 외무장관이었던 시몬 페레스는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백악관 경내에서 ‘팔레스타인 잠정 자치 확대에 관한 원칙 선언’에 서명했다. 서명식에는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의장. 왼쪽 두 번째는 이츠하크 라빈 당시 이스라엘 총리가 함께했다.

강경 매파였던 시몬 페레스가 핵기술을 보유한 이후 궁극적으로 원한 것은 평화였다. 팔레스타인의 아라파트를 포함한 아랍권과의 협상을 통해 영구히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것이었다. 시몬은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1993년 오슬로 협정을 이끌어내어 평화를 정착시키고 이듬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국내 극우파에 의해 라빈 총리가 암살당하고 시몬 역시 암살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지금은 비록 극우파에 의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포함한 아랍권이 다시 적대관계로 바뀌었지만, 중동 지역의 영원한 평화를 추구했던 시몬 페레스의 정신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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