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 내 아들 같은 안타까움에...집단 트라우마 노출 위험”…전문가들 “영상·사진 확산 막아야”

최정석 기자 2022. 10. 31.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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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 공간서 벌어진 참사가 과몰입 유도
트라우마 반복 노출 시 PTSD 걸릴 수 있어
“슬픔은 당연한 반응…받아들여야 뇌 건강”
31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 압사사고 인근에 마련된 추모공간을 찾은 시민들이 희생자를 추모하고 있다. /뉴스1

지난 29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 해밀턴 호텔 옆 골목에서 발생한 대규모 압사 사고로 154명이 숨지고 149명이 다친 것으로 집계됐다. 희생자들은 주말 핼러윈을 맞이해 놀러 나온 10대와 20대가 주를 이뤘다.

사고 당시 현장을 담은 영상과 사진은 유튜브를 비롯한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확산하고 있다. 트위터코리아는 이태원 사고 현장 사진, 영상을 공유할 시 내부 정책에 따라 제재를 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문제가 되는 게시물을 발견하면 신고해달라는 공지도 남겼다.

이와 관련해 정신과 관련 학회들은 사고 상황을 기록한 영상·사진 공유를 중단해달라 촉구하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30일 대한신경정신의학회에 이어 31일에는 정신건강의학과의사회가 성명서를 발표했다.

정신건강의학과의사회는 성명서에서 “(이태원) 사건 현장을 담은 영상과 사진이 트라우마로 작용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일으킬 수 있다”며 “과도한 몰입은 자제하는 게 좋다”고 경고했다.

트라우마(Trauma)는 인간이 일상생활이나 특수한 상황 속에서 겪을 수 있는 극단적이거나 충격적인 사건이다. 교통사고, 건물 붕괴 사고, 지진이나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 암과 같은 질병 등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하는 심각한 사건이다. 이태원 사건과 같은 육체적·정신적 상해를 남기는 일이나, 현장을 담은 영상, 사진 모두 트라우마가 된다.

전문가들은 이태원 사고 이후 수많은 영상과 사진이 확산하면서 많은 국민이 광범위한 트라우마에 노출된 상태라고 진단한다. 이는 이태원 사고가 가진 특수성 때문이다. 이광민 정신과 전문의는 “해외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나 자연재해 등으로 아무리 많은 사상자가 나와도 우리에게 별다른 정신적 영향이 없다”며 “‘자신과 상관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무의식 중에 깔려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이태원 사고는 많은 사람들이 평소 일상적으로 오가는 공간에서 발생했다. 정서적으로 가까운 곳에서 벌어진 참사이기 때문에 사고에 몰입하는 수준이 상대적으로 훨씬 높다는 것이다. 여기에 다른 사고들과 달리 시신 수습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촬영된 영상과 사진이 상당수 유포되면서 더욱 강한 트라우마로 작용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것이다.

이런 트라우마에 반복 노출되는 것은 PTSD를 일으키는 주요 원인이 된다. 인간이 트라우마에 직면하면 뇌에서는 ‘변연계’라 불리는 부분이 평소보다 훨씬 활성화된다. 변연계는 원초적 공포, 동물적 욕구 등 극단적 긴장상태에서 나타나는 반응을 관장하는 부위다.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은 변연계 과활성에 따른 ‘급성 스트레스 반응’으로 우울증, 불안장애를 보인다. 다만 이는 누구나 겪을 수 있어 오래가지 않는다. 공포 영화나 잔인한 영상을 보는 것만으로 변연계는 순간 과활성되지만 빠르게 원래 상태로 돌아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지만 트라우마를 장기간 반복적으로 겪으면 급성 스트레스 반응이 오래 지속되면서 PTSD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진다. 변연계가 과활성화된 채 원상태로 돌아오지 않으면서 뇌가 극단적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 결과 PTSD 환자에게서는 과도한 예민함, 조울증, 집중력 장애, 수면장애가 나타난다. 전문가들이 이태원 사고 영상, 사진을 반복 시청하지 말라고 권유하는 이유다.

이 전문의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염되듯 이태원 사고에 집단적으로 과몰입하면서 생기는 불안정한 정서가 점점 더 많은 국민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현장 상황을 자세히 묘사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거리를 둬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사고에서 개인이 느끼는 감정을 적절히 해소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홍나래 한림대성심병원 정신건강의학과교수는 “사고 관련 영상과 사진을 피하는 건 좋지만, 사고 사건을 접하며 드는 안타까움이나 슬픈 감정들을 억누르는 건 오히려 정신 건강에 해로울 수 있다”고 말했다.

홍 교수는 “외부 스트레스에 적절히 반응해야 오히려 뇌 신경 전달 물질들이 균형 있게 분비될 수 있다”며 “같은 사건을 봐도 슬픔의 크기는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반응을 보며 유난을 떤다 비난하는 행위도 삼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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