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로이트 글로벌 경제 리뷰] 일촉즉발의 영국 금융위기, 남 일 아니다
최근 영국의 어지러운 정세와 금융시장 소요가 글로벌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리즈 트러스(Liz Truss) 신임 총리가 이끄는 영국 정부가 막대한 에너지 보조금과 대대적 감세안으로 이뤄진 재정적 경기부양책인 이른바 ‘트러소노믹스(Trussonomics)’를 발표하자, 영국 공공재정이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투자자들 사이에 확산하며 영국 국채인 길트채 수익률이 치솟았고 주가는 하락했으며 파운드화 가치는 역대 최저 수준으로 곤두박질쳤다.
이에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촉발된 에너지 위기 때문에 치솟는 물가를 잡기 위해 수개월간 긴축정책을 지속하며 단기 금리를 인상하고 국채를 매각했던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OE)이 총대를 메고 방향을 전환해 “필요하다면 무한정 국채 매입에 나설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고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시작 이후 최대 규모의 금융시장 개입에 나서자, 시장이 안도하며 영국 주가가 반등하고 길트채 수익률이 반락했다.
영란은행을 움직이게 한 것은 영국 연기금들이다. 은행은 길트채가 심각한 매도세에 몰리자 영국 연기금들의 마진콜(추가 증거금 요구) 및 디폴트(채무 불이행) 사태가 촉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국채 매입 조치를 취했다. 실제로 트러소노믹스로 국채 수익률이 치솟자 영국 연기금들은 최대 1500억파운드(약 248조2500억원)에 달하는 손실을 본 것으로 나타났다. 한 가지만 보고 단순하게 움직인 트러스 내각의 실책으로 금융시장이 들썩이자, 곧바로 금융시스템상 취약점이 고스란히 민낯을 드러내 버린 것이다.
영국 금융시장 혼란은 감세정책 유턴과 재무장관 교체에 이어 트러스 총리 사임으로 일단락된 듯 보이지만, 금융시스템 여기저기에 매복해 있는 부비트랩은 여전히 위치를 알 수 없는 곳에 존재한다. 이 같은 금융시스템의 취약점이 실물경제와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이언 스튜어트(Ian Stewart) 딜로이트 영국 수석 이코노미스트의 인사이트를 빌려 다음과 같은 분석을 제시한다.
영국 경제의 금융거래 도관(financial plumbing)에는 불가사의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부채연계투자(LDI)다. 그리고 이번 위기의 중심에 바로 LDI가 있다. LDI는 파생상품을 이용해 미래 연금 지급 비용을 연기금의 자산 가치에 맞춘다. 연금은 운용 수익에 따라 연금 지급액이 결정되는 확정기여형(DC)과 운용 수익과 무관하게 사전에 약정된 일정 금액을 지급하게 돼 있는 확정급여형(DB)으로 구분되는데, 이번에 영국 연기금들을 위태롭게 만든 것은 DB에 해당한다.
저금리 시대가 장기화하자 DB형 상품의 운용수익 성적이 저조했던 탓에, 영국 연기금들은 국채를 담보로 레버리지를 늘려 투자하는 이른바 LDI 전략을 택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10년 넘게 공격적인 금리 인하가 지속되자, 국채 수익률이 사상 최저 수준으로 추락하면서 DB형 상품에 따른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 연기금들은 금리 하락 리스크도 헤지하고 레버리지를 동원해 수익도 끌어올릴 수 있는 LDI 전략을 택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특히 영국 연기금들은 세계 최대 채권펀드인 블랙록을 필두로 대형 운용사들이 경쟁적으로 제공하는 LDI 펀드를 주로 이용했는데, 영국 투자협회 자료에 따르면 2021년 말 기준으로 LDI 펀드의 자산 규모는 영국 국채 시장 규모의 절반을 넘었다.
하지만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를 시작으로 전 세계적 금리 인상 물결이 이어져 국채 시장이 매도세에 몰리자, 이러한 LDI 전략에 위험의 불씨가 싹트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트러스 내각이 경기부양을 한다며 길트채 가격을 거의 종잇장 수준으로 떨어뜨리자 영국 연기금들의 LDI 전략이 한층 위태로워졌다. 영국 30년물 길트채가 대량 매도세에 몰리면서 연기금들은 LDI 전략에 물린 레버리지 거래의 증거금을 늘려야 했고, 이에 따라 보유하던 길트채를 투매해야 하는 입장에 몰렸다. 이로 인해 길트채 매도세가 더욱 심화되며 가격이 한층 하락하고 이에 따라 마진콜이 발생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BOE가 개입하면서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국채를 추가 매입하겠다”는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면, 이번 길트채 매도세는 자칫 금융위기를 촉발할 수도 있었다. 이번 사태는 자산 가치의 급락과 치솟는 변동성에 금융시스템이 얼마나 취약한지, 그리고 금융시장의 여파가 얼마나 빨리 실물경제로 확산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위기가 발생하면 금융시스템의 작동을 가능케 하는 네트워크가 오히려 독을 퍼뜨리는 통로가 되어 충격파를 위기의 진앙에서 먼 곳까지 전달한다.
2008년 리먼 브러더스 붕괴 사태가 대표적인 금융시장 시스템 붕괴 사건이다. 리먼 사태의 충격파는 금융시장 전반에 퍼져 자산 가격이 급락하고 유동성이 고갈됐다. 그 충격의 규모와 범위에 정책입안자들은 허를 찔렸고, 당시 미국의 경기하강 국면이 1930년대 이후 가장 심각한 경기침체로 돌변했다. 그로부터 4년 후인 2012년에 발생한 유로존 채무 위기도 금융시스템 붕괴의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재정 위기에 놓인 국가들의 국채 가격이 급락하면서 이들 국채를 보유한 은행들의 지급능력도 휘청거렸다. 당시 과도한 정부 부채가 은행권 위기로 확산할 것이라는 공포가 금융시장을 짓눌렀다. 유럽중앙은행(ECB)이 위험에 처한 국가들의 국채를 무제한 매입하겠다고 나선 후에야 유로존 채무 위기는 진화되기 시작했다.
경제란 복잡하고 항시 변화하는 시스템이고, 위협이란 특이한 방식으로 작동하며 잠복하고 있다가 불거지는 경우가 많다. 평균에만 초점을 맞추면 극단의 상황에 대비하기 힘들 수 있다. 미국 연준조차 2008~2009년 금융위기가 발발하기 전에는 금융시장 안정성을 뒤흔들 위험 요소로 주택시장을 지목한 적이 없다. 일반화의 함정에 빠져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 대출) 부문에서 채무와 함께 위험이 축적되는 상황을 간과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결국 금융시장을 붕괴시킨 침전제 역할을 했다. 이처럼 금융위기는 막으려 해도 끊임없이 재발하고, 대부분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충격파를 던진다. 정책입안자들의 고민이 깊어지는 대목이다.
트러스 총리는 금리가 급격히 인상되는 시기에 저금리 시대에나 통할 법한 차입에 의존한 ‘무작정 돈 풀기’의 방식으로 금융시장 혼란을 초래했다. 감세로 투자를 활성화시켜 경제 전반의 성장을 촉구한다는 ‘낙수 이론’을 따른 경기부양책이었지만, 생각 없이 던진 돌멩이가 개구리의 생명에 해를 입혔다. 그가 금융시장과 실물경제 간 복잡한 연관관계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단순히 내놓은 정책은 금융시스템의 숨은 뇌관을 건드려 눈 깜짝할 사이에 실물경제에 돌이킬 수 없는 충격파를 던진 것이다.
트러스 총리는 정책 유턴과 쿼지 콰텡 재무장관 경질 등 수습에 나섰지만 결국 시대에 뒤떨어진 정책 헛발질로 영국 금융시장을 휘저어 놓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영국 역사상 ‘역대 최단명 총리’라는 불명예를 안고 사임하기에 이르렀다.
경기가 후퇴하고 금리가 인상되는 시기에는 경제와 금융시장 전반에 새로운 압력이 가해진다. 최근 길트채 시장의 소요는 이러한 위험과 더불어 다가올 스트레스와 서프라이즈에 주의하라는 경종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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