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직 변호사의 DX문화살롱](42)초연결사회, 말이 통하지 않는 이유

2022. 10. 31.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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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란 단어가 없다면 불행할까. 그래도 행복할 수 있을까. 언어학자 소쉬르는 언어가 기호이고 바깥으로 표시되는 기표(記標)와 속뜻인 기의(記意)로 이뤄져 있다고 했다. 쌍떡잎식물 장미과 낙엽교목 식물의 한 열매는 한국에선 사과, 영미에선 애플이다. 과일 명칭이 사과, 애플일 필연적 이유가 있을까. 없다. 원시 공동체에서 누군가 그렇게 불렀다. 때론 다른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결국 사과, 애플로 굳어졌다. 사과, 애플이라는 말은 기표고,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과일은 기의다.

기표는 기의를 알기 위해 우연히 선택된 단어에 불과하다. 당연히 기의가 기표에 우선하나 반론도 있다. 기표와 기의는 혈연관계처럼 필연적으로 연결된 것이 아니다. 기표와 기의 사이엔 장벽이 있다. 강아지와 개새끼는 모두 개라는 동물에서 나오고 그 의미만을 보면 동일 유사어에 해당한다. 그러나 강아지는 귀여운 작은 개를 말하고 개새끼는 욕을 먹어 마땅한 인간을 일컫는다. 강아지와 개새끼는 어떤 경로를 거쳤는지 불문하고 개라는 기의를 떠나 다른 의미를 가진 기표가 된 것이다. 식당에 가면 여자 사장 또는 여자 종업원을 이모라고 부른다. 어머니의 여자 형제와 어떻게 다른가. 기표가 기의를 벗어나고 있다.

기표는 기의에 닿지 못하고 계속 미끄러진다. 하나의 기표가 다른 기표에 의존하면서 기표가 기의에 바로 가지 못하고 떠돌게 된다. 가짜가 진짜를 압도하듯 기표가 기의에 우선하게 된다. 예를 들면 인공지능은 인간의 학습능력, 추론능력, 지각능력, 자연어 처리와 이해능력 등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실현한 기술이다. 이것만으로 인공지능이 완벽히 정의됐을까. 그렇지 않다. 우리는 학습능력, 추론능력, 지각능력, 자연어 처리와 이해능력이라는 기표의 정의를 다시 찾아야 한다. 기표가 기의에 직접 닿지 못하고 다른 기표에 의존하며 겉돌고 있다. 우리는 인공지능이라는 코끼리를 이리저리 만지며 추측하는 장님일지 모른다.

디지털 시대는 어떤가. 온라인에는 특정 계층이 사용하는 그들만의 은어, 약어, 비속어가 넘친다. 듣고 싶은 말만 듣고 하고 싶은 말만 한다. 생각이 다르면 기표가 달라지고 원래의 기의와 다른 뜻을 가진다. 디지털 시대 언어는 겉돌고 공동체를 분열시킨다. 세대, 계층, 진영 간 언어에 의한 편 가르기는 말이 통하지 않는 사회를 만든다.

과거 농경시대 소통은 자연스럽고 깊었다. 공동 목적인 농경을 위해 삶을 공유하는 공동체 특징이다. 먹고 살기 위해 같은 기표를 사용했고 다른 기표가 들어올 틈이 없었다. 호미는 호미여야 했고 숟가락일 수 없었다. 다른 기표를 사용하면 적이 됐다. 다른 방언을 쓰는 공동체를 적대시하거나 이질적으로 대한 것도 그 이유다. 지역갈등 원인이기도 했다. 불통의 장점은 권력자에게 있다. 소통은 다양한 의견과 아이디어를 만들고 권력과 다른 목소리를 내기 쉽다. 과거 일방향 소통수단이던 방송이 정치에서 중요했던 이유다. 정권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국민 모두 한 방향을 봐야 하는 산업화가 성공한 것도 그 이유다. 지금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적고 업종과 직업이 다양하다. 데이터, 인공지능 등 협력이 필요한 사회다. 불통은 국가와 사회 정체를 낳는다. 소통에서 아이디어가 나오고 산업, 비즈니스가 나온다. 숫자는 어떤가. 정부 또는 기업 보고서는 기의와 무관한 기표만이 강조되고 있다. 국가 경쟁력 세계 몇 위, 시장점유율 몇 위, 매출 몇 배 달성 등 구호가 그것이다. 기의와 관계없이 기표만 돌아다니며 사람을 속인다.

공동체를 위해 무의미한 기표를 벗어나 깊이 숨어있는 속뜻(기의)을 찾아야 한다. 타인을 짓밟아야 살아남는 경쟁 사회에선 공통의 기의를 찾을 수 없다. 타인을 배려, 존중하고 발전을 도와주는 것이 공통 기의를 찾는 첫걸음이다.

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나는 인공지능을 변호한다' 저자) sangjik.lee@bk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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