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로 국민 모두 '트라우마 고위험군' 됐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를 겪은 국민들의 정신건강에 위험신호가 켜졌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을 겪은 당사자는 물론 사고 수습에 나선 인력과 이를 지켜본 전국민들이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겪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국민들 대다수가 트라우마 고위험군이 됐다는 분석이다.
일명 트라우마로 잘 알려진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는 죽을 뻔한 상황이나 이와 비슷한 충격을 경험할 때 발생하는 불안장애의 한 종류다. 직접 사고를 경험하지 않아도 이를 간접적으로 관찰하는 행위로도 외상이 발생할 수 있다.
31일 전문가들은 이태원 참사가 이전까지 발생했던 대형사고보다도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는 위험군과 발생시기가 예측하기 어려운 만큼 조기에 적절한 의학적 조치가 이뤄질 필요가 있다는 설명이다.
정찬승 한국스트레스학회 홍보이사(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이태원 참사의 경우 우리 일상과 너무나 가까운 장소에서 발생했으며 관련 영상이나 미디어 등 자료가 이전 사고보다 월등히 많이 생산됐다는 특징이 있다”고 설명했다. 많은 목격자들이 있는 장소에서 벌어진 사고인 만큼 관련 목격담이나 영상, 사진 등의 자료가 훨씬 많다는 것이다.
정 이사는 “다양한 형태의 정보물을 통해 사람들이 사고에 대한 정보를 지나치게 많이 접하게 되고 있다”며 “특히 생생한 영상물은 직접 사고를 겪은 사람과 비슷한 수준의 충격을 가할 위험도 높다”고 지적했다.
●위험에 대비하는 뇌의 기능이 고장나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겪게 되면 정신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뇌의 변화가 일어난다. 우리 뇌에는 위험한 상황에서 몸을 대비하게 만드는 편도라는 기관이 있는데 이 부분이 활성화되면 위험을 의식하기 전 몸을 움직여 위험을 회피할 상태를 만든다. 위험이 사라지면 전대상피질이란 부위가 활성화돼 이러한 긴장상태를 멈춘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가 발생하면 이러한 전환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거나 원치 않아도 신체가 긴장한 상태가 지속된다.
이밖에도 쾌락과 불안을 조절하는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벤조다이아제핀수용체 등의 조절에 문제가 생긴다. 외상후스트레스는 계속해서 생각이 떠오르는 일상 속 증상뿐만 아니라 심할 경우 자율신경계가 과도하게 각성 돼 집중력 저하, 불면과 같이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증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는 단기간에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오랫동안 지속되기도 한다. 사고를 겪은 직후에 나타날 수 있지만 한참 뒤에 증상이 발생할 수도 있다. 국립중앙의료연구원 소속 이소희 전문의 연구팀이 2021년 국제학술지 '정신과연구'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세월호 사건 생존학생의 6.3%는 사고를 겪고 2년 6개월 이후에도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호소했다. 해외 연구에선 사고가 발생하고 30년이 지난 뒤 증상이 발생한 경우도 보고됐다.
●사고 당사자부터 사고를 접한 국민 모두 ‘고위험군’
이번 이태원 핼러윈 참사를 직간접적으로 겪은 사람들은 모두 외상후스트레스장애의 위험군이다.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에 따르면 충격적인 사고가 미치는 영향의 정도는 ‘재난 충격의 피라미드’에 따라 나뉜다.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것은 사고를 겪은 당사자들이다. 이어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가족과 지인, 사고 현장에 투입된 인력 순으로 강도 높은 충격을 받게 된다. 사고 현장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사람들 다음으로는 평소 정신건강이 불안정하거나 또는 사망자들과 유사한 환경에 있는 사람들이 해당한다. 마지막으로 일반인과 사회 전반도 영향권에 있다.
실제 사람들이 외상후스트레스를 겪을 확률은 이러한 기준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사고 당사자가 아닌 주변인들이 더 오랫동안 외상후스트레스 장애를 겪은 경우도 있다. 이소희 전문의의 해당 연구결과에 의하면 같은 기간 세월호 생존학생보다 이들의 유가족이 증상을 보인 비율이 83.6%로 훨씬 높았다.
●혐오와 책망도 외상후스트레스장애의 일종
전문가들은 외상후스트레스장애가 야기할 수 있는 중요한 행동 중 하나로 비난과 혐오를 꼽는다. 충격적인 사고를 접하면 부정적인 감정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를 공격적으로 분출하기 위한 원인책을 지목하는 경향이 관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찬승 이사는 “증오, 차별, 비난, 혐오와 같은 정서가 발현되는 것은 전형적인 트라우마 반응”이라고 말하며 “이러한 감정의 대상을 찾아 부정적인 감정을 투사하고 자신은 사건과 멀어지고자 하는 심리적 기전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하지만 이러한 감정의 발산은 트라우마의 위험성을 높일 뿐 마음의 상처를 회복하는 것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상태의 연장선상으로 불안후격분장애(PTED)가 찾아올 수 있다. 스트레스로 인한 불안증상이 울분과 분노와 같은 공격적인 감정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정 이사는 “외상후스트레스는 수십년이 이어질 수 있는 마음의 상처로, 치유하기 위해선 사회 전반에 걸친 우호적인 수용의 분위기의 형성이 중요하다”며 “충격적인 사고 이후 정신건강의 악화로 2차피해를 겪는 사례가 발생하지 않도록 우리 모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당부했다.
[박정연 기자 hess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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