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에서] '기후'라는 이름의 무역장벽

최승진 2022. 10. 31.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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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對)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규제는 한국 경제에 많은 점을 시사한다. 비록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운영하는 중국 내 공장에는 규제 적용을 1년간 유예하기로 했지만 여전히 불확실한 부분이 많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반도체 한국'이 스스로 미래를 결정하지 못하는 신세에 놓였다는 점이다. 미국, 유럽 등 서방 세계가 주도하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서 지정학적 변수는 가장 우선순위에 있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 양상이, 그리고 주변 강국들의 힘의 논리가 새로운 무역장벽을 세울 전망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한국은 '기후'라는 이름의 무역장벽도 마주하고 있다. 초고화질 8K TV에 대한 에너지 기준을 강화하려는 유럽의 움직임이 대표적인 사례다. 에너지 효율 기준을 충족하는 상품이 없기 때문에 사실상의 '수출 제한' 조치라고도 볼 수 있다. 현실화되면 삼성전자와 LG전자 같은 한국의 가전 기업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는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유럽은 '기후'라는 명분으로 모든 수출상품에 장벽을 세우고 있다. 유럽연합(EU)은 2035년부터 화석연료로 가동되는 내연기관 신차 판매를 금지하기로 했다. 유럽 의회는 2030년부터 새로 짓는 빌딩에 대해 오염물질 배출을 금지했으며, 2050년에는 이 범위를 존재하는 모든 빌딩에 적용하기로 했다. 철강·정유·화학·물류 산업이 장벽을 마주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유럽의 움직임은 일견 비현실적이다. 여기에 에너지위기까지 겹쳤다. 그래서 현실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론도 국내 기업인들 사이에서 존재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은 유럽의 기후정책 방향을 더 선명하게 했다. 기후위기 극복은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는 것이고,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는 것은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를 줄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명분은 한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에 빼앗긴 제조업 주도권을 유럽으로 다시 가져오겠다는 행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기후'라는 무역장벽은 어디에든, 어떻게든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유럽은 애플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스마트폰과 전자기기의 충전단자를 C타입으로 통일하기로 했다. 유럽이 밀어붙인 명분 중 하나가 '폐기물을 줄여 환경을 지킨다'는 것이었다. 우리 정부와 기업들이 기후라는 무역장벽에 당장 대응을 시작해야 하는 이유다.

[최승진 산업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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