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제 삶을 감당하기가 그토록 어려울까

한겨레 2022. 10. 31.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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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김용규의 숲과 지혜]

여우숲에서 필자. 사진 여우숲생명학교 제공

잃어버린 생명성

한 인간이 어릴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우리나라처럼 교육과 공부로 내몰려야 하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학교를 마치면 이 학원에서 다시 저 학원으로, 학원이 내준 숙제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하는 아동기, 개미들이 나란히 줄지어 어딘가로 이동하는 풍경처럼 본격 서열화의 관문이 된 대학입시를 향해 행렬해야 하는 청소년기, 이제 대학마저 학문과 낭만보다는 취업의 통로 정도로만 여겨져 청춘의 본성 따위를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삭막하게 된 청년기…. 지구상 어디에 이토록 한참 피어날 시기에 쪼그라들고 움츠러들어 행진해야 하는 봄날의 생명들이 있을까? 그렇게 벅차게 교육받고 공부하면 삶은 그만큼 더 좋아져야 할 텐데 그 결과는 과연 어떤가? 한마디로 참담하고 우려할 수준이다. 지난해 우리나라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는 OECD 22개 국가 중에서 22위로 또 꼴찌를 기록했다. ‘국제 아동 삶의 질 조사’에서 한국 어린이들이 누리는 삶의 질은 35개 조사 대상국 중에서 31위로 최하위권이었다(국제아동권리기구 세이브더칠드런과 서울대 사회복지연구소 조사). 우리 사회의 구조와 부모들의 인식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면 저런 조사 결과는 앞으로도 매년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인생이 한창 자라고 피어나야 할 시기에 생명성과 순정한 사랑의 열망을 잃고 살아간다는 것처럼 슬픈 일이 어디 있을까. 미래세대의 현실을 생각하면 늘 마음이 아프다.

사진 픽사베이

부분만 진실이고 나머지는 허구인 신념

그래서 숲이 보여주는 생명과 삶의 근본 이치를 사유하고, 숲의 생명성을 체험함으로써 잃어버린 온전한 삶을 회복하고 새롭게 살아보려는 시도가 더욱 절실하다.

숲을 깊게 만나는 일은 근본을 마주하는 일이다. 숲을 사유하는 일은 이치를 터득하는 공부고 이치에 부합하는 삶을 실천하게 하는 자극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숲에 사는 자연의 생명 누구에게도 학교나 학원, 별도의 교육이나 공부가 없다. 나의 어머니도 무학에 문맹으로 평생을 사시다가 떠나셨다. 그러면서도 숲의 생명들은 주어진 자리에서 기어코 제 꽃을 피우고 열매 맺어내며 삶을 부지런히 사랑한다. 내 어머니도 훌륭히 그러하셨다. 이제는 작고하신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그러한 숲 생명들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우리를 향해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한 인간이 주어진 삶을 거뜬히, 살맛나게 살기 위해서는 어떠한 능력이 필요할까? 인생에 꼭 필요한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우리 교육과 공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아주 많은 학부모 대상 강연을 하면서 확인해보니 대개의 부모들은 공부를 잘하는 능력에 꽂혀 있었다. 유아·아동·청소년을 자녀로 둔 우리나라의 대다수 부모들은 공부를 잘하면 그 아이의 삶과 장래도 좋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것은 부분만 진실이고 나머지는 허구인 신념이다. 지금 우리 사회구조 속에서는 공부를 잘한 아이가 더 안정적이거나 고소득의 직업을 가질 확률이 당연히 높은 편이다. 하지만 공부를 잘하고, 그래서 안정된 고소득 직업을 확보하면 정말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을까? 이런 신념이라면 숲에 사는 생명도 가장 비옥한 땅에서 가장 높이 자라는 나무의 삶이 제일 좋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는 작은 열매나 쫓아다니는 참새나 오목눈이 같은 숲 언저리의 작은 새들보다는 고깃덩어리를 사냥하고 획득할 수 있는 매나 올빼미처럼 큰 몸집을 지닌 맹금류들의 삶이 훨씬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견해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저런 견해가 왜 부분만 진실이고 나머지는 허구인가? 생명에게 먹고 사는 일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굶주리며 꽃 피고 열매 맺는 식물은 어디에도 없다. 이 부분이 진실이다. 하지만 먹고사는 문제를 확실히 해결한 삶이라고 꼭 더 좋은 삶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허구적인 신념이다. 주변에는 절대적 가난 때문에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미 넉넉한데도 가진 것이 늘 모자란다는 생각에 빠져 괴로운 사람들이 훨씬 많다. 절대적 가난이 우리를 괴로움으로 이끌 수도 있지만, 삶의 진실한 실체를 헤아리고 그 실체의 진실에 머물면 가난이 자신의 삶을 불행의 아가리로 삼키게 두지는 않는다. 삶의 온전성을 확보한 사람들은 부유함 속에서 더없이 좋은 삶을 살 수도 있겠지만, 지혜가 자라지 못한 사람은 풍요 속에서도 한없는 빈곤을 경험한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부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부유한데 여전히 결핍감에 포획되어 사는 사람은 오직 더 갖고, 또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아등바등한다. 그런 이들 중에는 친구나 이웃, 세상의 곤란 따위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삶을 좋은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온전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진 픽사베이

삶에 필요한 단 두 가지의 능력

그렇다면 한 인간이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능력은 무엇일까? 숲이 전하는 지혜는 이렇다. 나는 그것을 ‘삶에 필요한 단 두 가지의 능력’이라고 정리해두었다. 온전한 삶을 사는 데는 두 가지 능력만 갖추면 족하다. ‘제 스스로 삶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 그 첫 번째요,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갈 힘’이 그 두 번째다. 나는 내 스스로와 주변 사람들이 이 능력을 갖추고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라왔다.

나무도 풀도, 이끼나 지의류도, 뱀도 지렁이도, 참새도 까치도 올빼미도 모두 제 스스로 삶을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삶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은 자신에게 닥쳐오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기꺼이 제 스스로 해결하고 넘어설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이다. 한마디로 제 삶의 주인이 되어 그 주인 자리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갖추는 것이다. 그것은 때로 도전과 역경 앞에 바위처럼 맞서는 용기와 내면의 힘을 갖추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겨울을 만나는 독사처럼 물러설 줄 아는 지혜를 포함하고 있는 힘이다. 이것은 또한 필요와 상황에 따라 내어줄 것을 내주면서 협력하고, 홀로만의 문제가 아닐 경우에는 연대를 이끌어내고 기꺼이 연대할 수 있는 관계 능력을 갖추는 것을 의미한다.

‘제 스스로 삶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갖추는 것은 온전한 삶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삶을 온전하게 하는 충분조건은 두 번째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랑하며 살 힘’을 갖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나의 정의는 지극히 간결하다. ‘사랑은 함께하고 싶은 것, 그래서 기꺼이 함께하는 것’이다. 떠올려보라. 우리는 사랑하는 존재와 함께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함께 차 마시고 밥 먹고 영화보고 산책하고 여행한다. 그리고 마침내 함께 살고 싶어 한다. 내 감각이 맞는다면 사랑에 빠졌다고 하는 커플들은 대개 이런 흐름으로 결혼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랑이 주는 기쁨의 절반만을 함께하는 것이다. 사랑은 그것의 또 다른 절반을 함께하고 싶고, 그래서 기꺼이 함께하는 것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나머지 절반은 대략 이런 것들이다. 그가 싱싱함을 잃고 늙어가는 나날들, 어느 날부터 드러나기 시작하는 그 사람 과거의 웅덩이와 그 아픔들, 어쩌다가 그가 삶의 경로에서 넘어져 용기를 잃고 절망에 젖어 흐느끼는 날들, 그에게 찾아온 병마와 그 처절함, 흐려지거나 뒤엉켜버려 내 이름조차 잊어버릴 수 있는 그의 망가지는 기억, 이제는 걷는 것도 불가능해진 몸, 심지어 그 몸에서 배어나오는 냄새나는 날들…. 이렇게 삶의 어두운 날들마저 함께하고 싶고, 그래서 기꺼이 함께할 수 있는 마음과 실천이 가능해야 그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할 힘을 갖춘 것이다.

여우숲에서 본 야경. 사진 여우숲생명학교 제공

자신으로부터 도망치지 않는 생명들

숲에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나무가 단 한 그루도 없다. 나무는 단 한 순간도 자신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게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과 평온한 바람과 적당한 비, 그 협조적인 날들을 먹고 자라는 나무는 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마침내 씨앗을 떠나보낸 뒤 안식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겪어내야 하는 삶의 어두운 측면들, 비협조적인 날들과도 기꺼이 함께한다. 봄날 애벌레가 자신의 새 이파리를 뜯어먹어도, 어렵게 피워낸 소중한 제 꽃을 누가 아무렇지도 않게 따먹고 꺾어도, 줄기나 가지가 무엇인가에 사정없이 꺾여도, 감당하기 버거운 폭풍우가 거세게 불어쳐 와도, 채 익지 않은 채로 열매를 잃어야 하는 애처로운 날에도, 서릿발과 눈보라가 무자비하게 몰아쳐 오는 시린 날에도, 나무는 풀은 제 삶으로부터 단 한 순간도 도망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모든 날들과 기꺼이 함께한다. 무엇보다 그렇게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내는 삶으로 자신을 존재하게 하는 다른 온갖 생명을 보듬고 품어낸다. 굼벵이·지렁이·지네·고슴도치·노래기·땅강아지·개미…, 벌·나비·나방·반딧불이·딱정벌레…, 노루·고라니·멧돼지·족제비·너구리·오소리…, 꿩·동박새·직박구리·멧비둘기·딱따구리·동고비·올빼미·부엉이·새매·온갖 철새들…. 이렇듯 때로는 중립적이거나 자신을 돕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신을 파먹으며 해를 가하는 모든 존재들을 나무와 풀은 기꺼이 품어낸다. 이 얼마나 눈물겹고 아름다운가! 사랑에 관한 진실은 숲이 전하는 가장 아름다운 지혜다. (사랑에 관한 더 자세한 이야기는 연재하는 글의 후반부, 결론 부분에서 다시 비중 있게 다룰 예정이다.)

충북 괴산 여우숲. 사진 여우숲생명학교 제공

그대 살아있는가? 생명성의 특징

우리는 왜 제 스스로 삶을 감당하기가 그토록 어렵고, 자신과 이웃을 사랑할 힘은 그토록 미약한가? 그 중요한 이유 하나는 우리 공부가 생명성을 채워가는 공부로 연결되기보다 반생명적 방향으로 향하는 삶을 겨냥해 왔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의 차이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은 생명성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늠하게 한다. 생물학에서는 생물이 무생물과 구분되는 특성을 대략 이렇게 꼽는다. ‘생물은 세포를 기본 단위로 하고, 물질대사를 통해 에너지를 변환하는 능력을 가졌으며, 자기증식능력과 항상성 유지능력을 가지고 있다.’ 근대이성의 특성을 따르고 있는 저 정밀한 생물학적 규명은 오늘날 유전공학 분야가 이루고 있는 눈부신 업적의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이겠으나, 우리가 삶을 감당하고 사랑하게 하는 데는 별 역할을 하지 못하지 않는가?

나와 함께 긴 호흡으로 공부하고 있는 이들과 숲을 사유하다가 정리해보게 된 다음과 같은 규명은 어떨까? 살아있는 존재들은 첫째, 모두 새로워지려 한다. 둘째, 새로워지기 위해서 기어코 모험한다. 셋째, 그래서 더러 아프다. 넷째, 살아있는 존재는 죽은 것보다 더 따뜻하다. 그리고 부드럽다. 그리고 더 잘 흔들린다.

태아를 생각해보자. 녀석은 새로운 세계를 향해 그 위험하고 좁은 산도(産道)를 한사코 통과하여 나온다. 이제 천장을 향해 눕혀둔 그 아이는 기필코 180도 방향을 바꾸기 위해 뒤집는다. 배밀이를 하고, 익숙해지면 드디어 기기를 시도하고, 기다가 마침내 일어선다. 일어선 그 아이는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며 기어코 걷기 시작한다. 그리고 뛰는 경지의 새로움에 이른다. 이 즈음이면 이제 가르친 적 없는데 질문하기 시작한다. 질문법을 배운 적이 없는 그 아이가 스스로 던져대는 질문은 크게 세 단계를 거치며 세계와 삶을 알아가고자 작동하는 흐름으로 진행된다. 우선 무엇이냐고 묻는다.(what) 스스로 분별하고 싶어 하는 단계이다. 다음에는 왜라고 묻는다.(why) 이제 인과가 궁금해지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사춘기 무렵이 되면 대단히 중요한 질적 전환의 단계에 이르는 질문을 (그 아이의 기질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은 퉁명스럽게) 던진다. “왜?, 뭐?” 이 불만을 품은 듯한 질문의 참뜻은 이전에 알고자 했던 단순한 분별과 인과를 묻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왜 재미도 없는 학교를 가라고?”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렇게 하면 뭐가 달라지는 거냐고?”처럼, 서툴지만 궁극을 알고 싶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차라리 이때의 “왜? 뭐?”는 “for what? so what?”에 가까운 질문으로 헤아려야 한다. 드디어 그 인간에게서 철학이 시작된 것이다.

사람만이 아니다. 땅에 떨어진 도토리 한 알도 날마다 새로워지려 한다. 그래서 날마다 모험한다. 그렇게 껍질을 벗고 땅을 뚫어 뿌리를 내리고 빛을 향해 잎과 줄기와 가지를 키워낸다. 물고기나 개구리의 알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경로를 통해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모두 모험과 함께 새로워지는 것이다. 모험하는 그 모든 순간에는 크고 작은 아픔과 상실이 함께 놓여 있다. 뜯기고 부러지고 잘리고, 잘못하면 송두리째 잡아먹히고…. 주저하거나 움츠러들거나 흔들리는 순간들이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과 나란히 걷고 있다. 그것이 삶이고 살아있음의 증거다.

숲을 함께 걷는 자리나, 강의하는 자리에서 나는 짓궂게 묻곤 한다. 당신은 새로워지려 하십니까? 그래서 기꺼이 모험하며 사십니까? 삶이 더러 아픕니까? 아픈 것이 마땅하다 여기십니까? 아프지 않으려 하십니까? 당신은 점점 부드러워지고 더욱 따뜻하고 자주 흔들리며 사십니까? 아니면 이 모든 방향과 반대로 향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웃거나 혹은 진지하게 대답한다. “나는 반대로 향하고 있었네요.” 뒤이어 사람들에게 너무 자책하지 말자고 다독인다. 이제라도 각성하고 살아있는 삶을 향해 살아있는 존재들의 특징을 하나씩 하나씩 삶으로 다시 데려와 보자고 제안한다. 새로워지려 하고, 그래서 기꺼이 모험하고, 아픔이 살아 있는 삶의 특징임을 받아들이고, 더 자주 부드럽게 미소 짓고, 때로 흔들리는 나를 자책 없이 응원하며 살아보자고 제안한다.

이 질문과 다독임은 실은 나 스스로와 우리 자신에게 ‘그대 살아있는가?’ ‘타고난 생명성과 함께, 살아있음의 기쁨을 누리며 살고 있는가?’ ‘살아있음의 기쁨을 향해 살아가자!’라고 던지는 물음이요 다독임이다. 이 물음과 다독임은 대단히 근본적인 것이며 또한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생명성 가득한 존재만이 제 스스로 삶을 감당하고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온전한 삶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김용규(여우숲 생명학교 교장)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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