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보라해', 규범의 틀지움에 일격을 가하다

2022. 10. 31.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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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해'는 추상명사 '보라(purple)'에 접미사 '-하다'가 붙어 탄생했다.
'보라하다'는 어법상으론 성립되지 않는다.
이 말이 존립하는 근거는 '믿고 사랑하다'란 새로운 의미를 담은 신조어라는 데 있다.
지난 23일 전남 신안군 ‘퍼플섬’에 설치된 방탄소년단(BTS) 뷔 생일 기념 조형물. ‘I PURPLE YOU(보라해)’는 BTS의 뷔가 만들어낸 신조어로 상대방을 끝까지 믿고 함께 사랑하자는 의미가 담겨있다. 연합뉴스


지난 15일 부산은 온통 보랏빛 물결이었다.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부산아시아드 주경기장에서 2030 부산세계박람회 유치를 기원하며 자선 콘서트를 연 것. 언론들은 이날 공연을 주요 기사로 다루며 분위기를 전했다. “보라해 BTS…5만 아미 떼창에 부산은 보랏빛 밤” “방탄소년단 보라해…도시 전체가 보랏빛으로 물든 부산”

 수많은 동사·형용사 파생시킨 접사 ‘하다’

그런데 방탄소년단 앞뒤로 붙은 말 ‘보라해’가 예사롭지 않다. 자주 붙어다녀 익숙해진 듯하면서도 왠지 낯설다. 우리말이긴 한데 무슨 암호 같기도 하다. 사전엔 나오지 않는다. 어색함이 묻어나는 까닭은 이 말이 통상적인 우리말 조어법에서 벗어난, 독특하게 만들어진 단어이기 때문이다. ‘보라해’를 통해 우리말 조어법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접미사 ‘-하다’ 용법과 그 일탈이다.

‘보라해’는 ‘서로 믿고 사랑하자’는 뜻으로 쓰는 신조어다. BTS 멤버 뷔가 2016년 팬사인회 때 즉석에서 만들어 널리 퍼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로 ‘보라해’로 쓰이지만, “옷을 보라하게 입었다” “아미 여러분, 정말 많이 보라합니다” 식으로 활용해서도 쓴다. 동사 ‘보라하다’를 기본형으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견하기에도 ‘보라+하다’의 결합으로 이뤄진 말임이 드러난다. 이때의 ‘-하다’는 접미사다. 일부 명사 밑에 붙어 우리말에서 부족한 동사, 형용사를 파생시킨다. 동작명사에 붙으면 그 말을 동사로 만들고, 상태명사에 붙으면 형용사로 바꿔준다. 가령 ‘칭찬하다, 명령하다’ 같은 말은 ‘칭찬, 명령’이란 동작성 명사에 ‘-하다’가 붙어 파생된 동사다. 상태명사 ‘만족, 건강’ 등과 어울려서는 형용사 ‘만족하다, 건강하다’ 등을 만든다. ‘-하다’의 이 같은 기능 덕분에 우리말은 부족한 동사와 형용사를 비약적으로 늘릴 수 있었다. 우리말 안에서 기여도가 탁월한, 생산성이 매우 높은 접사인 셈이다.

 ‘언어적 일탈’ 통해 상투성 깨는 신조어들

하지만 ‘-하다’는 순수한 추상적 개념의 명사나 실체명사와는 잘 결합하지 않는다. 예컨대 실체명사인 ‘책’이나 ‘전화기’에 ‘-하다’를 붙여 쓰지 않는다. ‘평화’나 ‘자유’ ‘관념’ 같은 추상명사에 붙은 ‘평화하다, 자유하다, 관념하다’란 말도 허용되지 않는다. 동작성이나 상태성이 없기 때문이다.

‘염두하다’는 글쓰기에서 흔히 범하는 오류 중 하나다. 이제 이 말이 왜 잘못됐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염두(念頭)는 추상명사로, ‘마음속’과 같은 말이다. 그러니 ‘염두하다’라고 하면 ‘마음속하다’라는 건데, 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염두에 두다’ ‘염두에 없다’처럼 써야 한다. ‘기업하다’란 말도 곤혹스럽다. ‘기업하는 환경’ ‘기업할 자유’ 같은 표현을 흔히 본다. 기업(企業)은 경제활동의 한 단위로서 조직체를 뜻하는데, 여기에 ‘-하다’를 붙이는 것은 어색하다. 대개 ‘기업을 영위하다’란 의미로 ‘기업하다’를 쓰지만 이는 적절치 않다. 조직체인 ‘기업’과 ‘하다’가 결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사업을 일으키다’란 뜻으로 쓰는 ‘기업(起業)하다’는 가능한 표현이다.

‘보라해’는 추상명사 ‘보라(purple)’에 접미사 ‘-하다’가 붙어 탄생한 신조어다. 어법적으로 보면 ‘파랑하다, 빨강하다’가 말이 되지 않듯이 ‘보라하다’도 당연히 성립하지 않는다. 이 말이 존립하는 근거는 ‘믿고 사랑하다’란 새로운 의미를 담은 신조어라는 데 있다.

<저널리즘 글쓰기 10원칙> 저자·前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신어는 새로운 말이 탄생하는 것이라 단순히 문법의 범주로 틀 지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규범을 깸으로써 오는 ‘의미의 긴장’ 효과를 노린다. ‘보라해’는 그런 ‘언어적 일탈’을 감행한 결과다. 이를 통해 기성 언어의 상투성과 진부함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사람들에게 깊은 각인을 심어줬다. ‘1도 없다’를 비롯해 ‘라떼는 말이야’, 야민정음 ‘댕댕이’류 등 탁월한 조어가 많다. 모두 우리말이라는 거대한 용광로 안에서 실험하고 경쟁하는, 그럼으로써 우리말을 살찌우는 기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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