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고 알바했어요" 건당 40만원 '피싱 심부름'…넌 무죄 난 유죄, 왜?
#. 지난 8월 26일 오후 5시 20분 서울 동대문구 지하철 1호선 청량리역 3번 출구 앞. 50대 여성 A씨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서성였다. A씨에 20대로 보이는 남성이 다가와 2300만원을 건넸다. 돈을 받아든 A씨는 인근 현금자동입출금기(ATM)으로 향했다. ATM에 현금을 입금하려던 여성은 주변에서 잠복 중인 경찰에 체포됐다.
경찰 조사 결과 A씨는 1차 수거책인 20대 남성 B씨에게 돈을 건네받아 ATM을 통해 윗선에 송금하려던 것으로 알려졌다. B씨는 이날 오후 목적지를 수차례 바꾸는 걸 수상하게 여긴 택시기사의 설득 끝에 경찰에 자수했다. B씨 진술을 통해 2차 수거책과 접선 장소와 시간을 파악한 경찰이 A씨를 현장에서 체포한 것이다.
이 사건에서 B씨는 훈방 조치됐지만 A씨는 사기혐의로 송치됐다. 보이스피싱 수거책이라는 점은 같았지만 남성은 자수를 선택했고 A씨는 범행을 실제 옮기려 했던 탓이다.
'고액 아르바이트' 광고를 통해 보이스피싱 범죄인지 모르고 가담했더라도 처벌을 피하기는 쉽지 않다. 보이스피싱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높아지고 피해금액도 누적되면서 법원에서도 단순 가담자에 대한 처벌을 높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조사결과 A씨와 B씨는 모두 고액 아르바이트 유혹에 넘어가 범죄임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보이스피싱(전화금융사기) 현금 수거책 역할을 했다. 하지만 자수를 통해 '속일 의도가 없었음'이 드러난 B씨와 달리 A씨는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
경찰 관계자는 "가담 정도나 피해액에 따라 처벌이 모두 다를 수밖에 없지만 최초 가담자가 자수하는 경우 정도가 아니고서는 최근에 보이스피싱 피해액이 커지면서 훈방조치는 거의 없다"며 "보통 수거책이 건당 10만~40만원 정도 지급받는데 성인 상식선에서 현금을 심부름해주는 것도 이상하고 단순 심부름에 대한 지급액수가 크다면 무조건 의심해보고, 혹시 가담했더라도 바로 자수하면 선처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경찰 등에 따르면 지난해 전화금융사기 피의자 총 2만2045명 가운데 20대와 30대 비율은 약 63%였다. 연령대별로 20대 이하가 9149명으로 가장 많았고 30대가 4711명으로 뒤를 이었다. 40대와 50대는 각각 3777명, 3152명이었다. 60대(1133명)는 물론이고 70대 이상 피의자도 123명이었다.
이 중 현금 수거책, 인출책 등은 대다수가 인터넷 구인광고를 통해 모집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보이스피싱 모집책들은 불법 인터넷 도박사이트나 정상적인 구직 사이트는 물론 인터넷 카페 등을 활용해 건당 10~40만원을 준다며 광고를 올린다. 주로 △거래처 대금 회수 △채권추심업무 △대출금 회수 △판매대금 전달 등의 업무를 한다고 소개하거나 △사무보조 △단순 심부름 등을 가장하는 경우도 많다.
서울 일선서의 한 수사관은 "구인광고를 보고 수거책이나 인출책으로 모집된 사람들이 업체 측에 물어보면 당연히 업체 측에서는 '우린 보이스피싱이 아니다'라고 말한다"며 "우리 회사 법무팀이나 금감원 등에 전화해서 물어보라고 안내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들도 모두 보이스피싱 일당"이라고 했다.
일정 기간을 두고 여러 차례 보이스피싱에 가담했다면 형량은 더 높아진다. 지난 6일 서울동부지법 형사6단독 박강민 판사는 보이스피싱 수거책을 활동해 사기 혐의로 구속 기소된 40대 여성 A씨에게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했다. A씨는 지난해 12월3일부터 31일까지 수도권 곳곳에서 검사나 금융감독원 직원을 사칭한 보이스피싱에 속은 피해자들에게 9억2492만원을 건네받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형법 제114조(범죄단체 등의 조직)에 따르면 사형, 무기 또는 장기 4년 이상 징역에 해당하는 범죄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 또는 집단을 조직하거나 이에 가입 또는 그 구성원으로 활동한 사람은 그 목적한 죄에 정한 형으로 처벌한다.
사기죄가 인정될 경우 10년 이하 징역이나 2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해진다. 그런데 요구 또는 약속한 금품이나 그 밖의 이익의 가액이 3000만원 이상일 때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법)이 적용돼 무거운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따라서 사기를 목적으로 보이스피싱 조직을 만들거나 가담하면 특경법에 따라 범죄 이득액이 50억원 이상인 때에는 무기 또는 5년 이상 징역, 5억원 이상 50억원 미만인 때에는 3년 이상 유기징역에 처할 수 있다.
점조직 형태로 운영되는 보이스피싱 조직 특성을 감안하면 구인광고를 올린 조직 총책의 규모를 알기는 어렵다. 구인광고를 보고 단순히 가담했어도 검찰과 경찰의 수사 결과에 따라 범죄조직원이 돼 있을 수 있는 셈이다.
서울 일선서의 한 형사과장은 "검경이 합동으로 조직을 일망타진해 범죄단체조직죄를 의율한 경우도 있다"며 "이 경우 일정 기간 여러차례 가담한 사실이 확인된 수거책도 범죄단체의 일원으로 처벌할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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