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동M본부] 국정원 고발 '미스터리'‥"삭제 지시 전에 삭제했다"?
문 정부 안보라인 겨눈 검찰‥발단은 국가정보원 고발장
지난 27일 서훈 전 국가안보실장 등 문재인 정부 당시 안보라인 최고위 관계자들이 나란히 기자회견에 나섰습니다. 지난 2020년 서해에서 북한군 피격으로 숨진 어업지도선 공무원이 월북으로 몰아갔다는 의혹을 전면 반박하고 나선 겁니다.
검찰은 지난 7월부터 이 사건을 수사해 왔습니다. 수사는 서욱 전 국방장관, 김홍희 전 해경청장을 구속하는데 이어, 문재인 정부 안보 수장들을 차례로 겨누고 있습니다.
수사의 발단은 국가정보원의 이례적인 전직 원장들에 대한 고발이었습니다. 국정원은 윤석열 대통령과 형제의 연을 맺었다고 알려진 특수통 조상준 기획조정실장 부임 후 직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감찰을 벌였습니다. 역시 특수통으로 꼽히는 최혁 부부장 검사가 파견 형식으로 국정원에 합류했습니다.
국정원은 고발 당시 "자체 조사 결과 첩보 보고서 무단 삭제 혐의 등으로 대검찰청에 박지원 전 원장 등을 고발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중요한 보고서들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문건이 삭제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설명했습니다.
'퇴직자'가 1급 회의에?‥"최고 정보기관의 허술한 고발장"
국정원이 파악한 박 전 원장의 범죄 혐의 내용은 알려진 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MBC는 국정원의 고발장 내용을 입수해 확인했습니다. 곳곳에서 석연치 않은 점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국정원은 박지원 전 원장이 공무원 피격 첩보가 입수된 지 하루 뒤인 9월 23일 오전 9시 30분에서 10시까지 원장 집무실에 차관급과 1급 간부들이 참여하는 정무직 회의를 열었다고 기재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국정원 시스템에 등재된 서해 공무원 피살사건 관련 첩보 및 보고서를 즉시 삭제하라는 취지의 지시를 하였"다고 적었습니다.
회의에는 노은채 국정원장 비서실장, 김선희 3차장, 이석수 기조실장 등이 참석했다고 적었습니다. 그런데 이석수 기조실장은 회의 한 달여 전인 8월 초 이미 퇴직했습니다. 삭제 지시가 있었다는 핵심 회의에 엉뚱한 참석자를 기재한 겁니다. 이석수 전 기조실장은 MBC와의 통화에서 이 사실을 전해 듣고 "최고 정보기관의 고발장으로는 너무 허술하다"며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국정원'장' 아닌 국정원이 고발주체‥형식조차 허술
이뿐만이 아닙니다. 고발장엔 이번 고발의 주체가 "국가정보원"으로 적혀 있었습니다. 공무원 또는 전직 공무원의 직무 관련 범죄를 발견하면, 통상 훈령과 지침에 따라 각 행정부처의 장이 고발합니다. 국가에 속한 중앙행정기관은 법인격이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엔 "국가정보원"이 아닌 "국가정보원장"이 고발 주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죠.
복수의 법조인들은 "법리적으로 고발 자체의 효력에 문제가 생길 정도는 아니"지만 "기관장이 아닌 기관 명의로 고발한 건 이례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고발 당시 국정원은 "신임 지휘부 차원에서 사건 진상규명에 대한 의지가 있고, 정보왜곡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휘부의 의중이 실린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이렇게 강조한 것치고는 고발장의 내용은 물론 형식까지 헛점이 많았던 셈입니다.
감사원 발표 함께 따져보니‥"삭제 지시 전에 삭제했다"?
검찰은 고발장의 일부 내용을 지운 채 변호인에게 제공했습니다. 현재 제공된 고발장에는 국정원이 파악한 정확한 첩보 삭제 시점은 적혀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다른 기관, 감사원은 삭제 시점을 밝혔습니다. 국정원과 해경, 국방부 등에 대해 광범위한 감사를 벌인 감사원은, 국방부와 국정원에서 새벽 3시에 동시에 첩보가 삭제됐다고 밝혔습니다. 서로 다른 기관에서, 그것도 새벽 시간에 동시에 서해 피격 사건 첩보만 골라 삭제됐다는 겁니다. 분명히 '윗선'의 분명한 지시가 있었다고 중간결과를 발표한 겁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국정원은 고발장에서 박 전 원장이 오전 9시 반 국정원 정무직 회의에서 삭제를 지시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시간 순서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2020년 9월 23일 새벽 1시 : 청와대 안보 수장 회의 - 은폐 결정 (감사원 감사 결과) 새벽 3시 : 국방부·국정원 동시 첩보문건 삭제 (감사원 감사 결과) 오전 9시 반 : 박지원 당시 국정원장 삭제 지시 (국정원 박 전 원장 고발장)
감사원과 국정원의 발표 내용을 종합하면, 국정원에선 삭제 지시 이전에 자료 삭제가 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겁니다.
배후로 지목된 '청와대 안보실'‥미스터리 풀리나?
검찰과 감사원 모두 삭제의 배후에 청와대 안보실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MBC가 확인한 박 전 원장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에도 이런 의심이 담겼습니다. 검찰은 영장에 박 전 원장과 서훈 국가안보실장, 서주석 안보실 1차장, 노은채 전 비서실장, 김선희 전 국정원 3차장까지 모두 5명을 공범으로 적시했습니다.
5명 가운데 현재까지 조사를 받은 건 김선희 전 3차장과 노은채 전 실장까지입니다. 특히 노은채 전 비서실장은 박지원 전 원장의 '삭제 지시'를 전달한 것으로 지목됐는데요. 노 전 실장은 "'첩보에 대한 국방부 결론이 아직 나오지 않았으니 보안에 유의하라'는 지시를 전달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검찰이 지목한 다른 공범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서훈 전 안보실장도 27일 국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자료 삭제 논의 자체가 없었고 안보실장하고 국무위원 관계가 지시를 주고 받는 관계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박지원 전 원장 역시 "최고의 헌법기관, 최고의 정보기관이 없는 사실 지어내고 있기 때문에 앞뒤가 맞지 않는다"면서 "감사원 시간과 국정원 시간이 왜 다르냐"고 지적했습니다.
검찰은 "피고발인들이 형사사법 절차를 통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고만 밝혔습니다. 검찰 신문 조서에 담긴 발언만 의미가 있기 때문에 신경쓰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박 전 원장 등에 대한 소환은 멀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검찰이 조서에 의미있는 진술을 받아내, 과연 청와대 안보실의 지시와 삭제 의혹을 밝혀낼지 수사는 정점으로 향해가고 있습니다.
나세웅 기자(salto@mbc.co.kr)
기사 원문 - https://imnews.imbc.com/news/2022/society/article/6422425_3567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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