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규모 군중 속 ‘난기류’의 위험, 1400여명 목숨도 앗아가[이태원 핼러윈 참사]

이정호 기자 2022. 10. 31.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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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지점 급한 경사로…‘몸무게·중력’ 합쳐지며 피해 키워
지난 29일 밤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해밀톤 호텔 부근 도로에 시민들이 몰려 있다. 이날 핼러윈 행사 중 인파가 넘어지면서 다수 사상자가 발생했다. 연합뉴스

지난 29일 발생한 이태원 핼러윈 압사 참사는 좁은 골목에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순식간에 발생했다고 현장에 있던 이들은 말하고 있다.

학계에선 군중이 일정 규모 이상으로 커지면 일종의 ‘난기류’ 현상이 나타난다고 해석한다. 공기가 격하게 움직이듯 군중이 어느 누구도 예측하기 어려운 집단적인 힘에 떠밀려 이리저리 움직여간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 휘말리면 누군가는 군중 안에서 넘어지기 마련인데, 이때부터 압사가 일어날 수 있어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특히 이태원의 경우는 참사 지점이 내리막길이었던 것도 피해를 키웠다. 군중 속에 빽빽이 서 있는 인원들이 서로를 압박해도 상당한 무게가 신체에 가해지는데, 앞줄에 있던 사람들이 넘어지면서 뒷사람들의 몸무게에 중력까지 더해지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압사 참사가 반복되지 않으려면 군중이 지나치게 많이 몰릴 것으로 예상되는 행사에선 애초 진입로를 통제해 단위 면적당 인원 수를 조절해야 한다고 말한다. 비상 대피로도 사전에 확보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인원 일정 규모 넘으면 ‘군중 난기류’ 현상

과학계에서 군중에 의한 난기류 현상을 발견한 곳은 압사 사고가 빈발하는 사우디아라비아다. 주로 성지순례 등 종교 행사 도중 발생했다. 1990년에 무려 1426명이 숨졌는데, 이슬람 성지인 메카로 향하는 보행용 터널에 사람이 집중되면서 비극이 일어났다. 압사 사고는 1994년, 1998년, 2004년에도 벌어져 각각 200여명이 숨지는 참사가 반복됐다.

2006년에도 사우디에선 362명이 사망했는데, 당시 상황을 정밀 분석한 독일 드레스덴 공대 연구진은 이듬해인 2007년 특별한 현상을 발견해 논문공개사이트 ‘아카이브’에 발표했다.

연구진이 사람들의 움직임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모의 실험했더니 군중들은 규모가 적을 때에는 모두 비슷한 속도로 특정 공간 안에서 전진했다. 에스컬레이터에 서 있는 사람들과 유사한 움직임이다.

그런데 군중 규모가 늘어나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자동차가 교통 정체를 겪을 때와 비슷한 모습이다. 사람이 사람을 떠미는 현상의 전조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연구진은 사람이 더 몰리면 군중은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였다고 분석했다. 군중 전체가 아무렇게나 떠밀리기 시작한다. 이때부터는 누군가가 군중의 방향을 안정적으로 틀 수가 없다. 이런 현상은 지난 29일 이태원 참사 현장 인근에서 찍힌 동영상에서도 볼 수 있다.

연구진은 “난기류과 비슷한 일이 생긴다”고 설명했다. 난기류는 여러 방향의 공기 움직임이 불규칙하게 뒤엉킨 현상이다. 예측하기 어렵고 빠져나오기는 더 어렵다. 군중이 거친 바람처럼 휘몰아친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의 힘으로 버틸 수 없을 정도로 군중이 빠르고 강하게 움직이면 누군가는 넘어진다고 연구진은 지적했다. 연쇄적인 압사 사고가 시작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태원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졌다.

국내에선 또 다른 각도의 연구도 있다. 2010년 박준영 금오공대 기계설계공학과 교수는 교육과학기술부에 제출한 연구를 통해 좁은 공간에 일정 규모 이상의 사람들이 양방향 통행을 할 때를 가정한 시뮬레이션 분석을 했다.

길이 20m, 폭 6m의 통로에서 총 인원 700명까지는 안정적으로 엇갈려 통행하는 일이 가능했다. 하지만 800명이 넘자 사람들이 서로 밀착된 채 올짝달싹하지 못하고 정체된 모습이 지속됐다. 이태원 참사 현장에서도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이태원 참사 현장 개념도와 사건 일지
전문가 “미리 적정 인원 통제…비상 대피로 확보했어야”

전문가들은 좁은 공간에 사람이 몰리지 않게 통제하는 게 최선이라고 말한다. 단위 면적 당 인원이 적정선을 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학계에선 환경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1㎡당 5명 이상이 모이면 위험 징후로 본다. 7명 이상이면 압사가 일어날 수 있고, 12명이 넘어가면 대참사가 확실시된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이태원 사고 현장에는 1㎡당 8~10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박청웅 세종사이버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밀집도가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시간을 두고 사람을 진입시키는 형태의 조치가 강구돼야 한다”며 “사전 통제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태원처럼 좁은 골목에선 주요 진입로마다 입장 인원을 제한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특히 압사 사고가 난 이태원 골목은 경사도 10% 정도의 비교적 급한 내리막이었다. 사람들이 넘어지면서 겹겹이 쌓이는 상황이 됐다. 박 교수는 “몸무게에 중력까지 더해지면서 아래에 깔린 이들을 압박하는 힘은 매우 컸을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압사 사고가 일어날 상황이 되면 스스로 몸을 보호하기는 쉽지 않다. 사람들에게 짓눌린 상황에서 자신의 팔을 구부려 가슴 앞에 숨 쉴 공간을 만드는 건 대단히 어렵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조성일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이번 이태원 핼러윈 행사 때 긴급시에 이용할 대피로를 마련하고 인파 사이에 안내나 구조를 담당할 요원을 배치해야 했다”고 말했다. 이어 “비상 상황을 알릴 수 있도록 주변 가게에서 나오는 시끄러운 음악을 꺼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전파 시스템도 준비했어야 했다”고 강조했다. 이런 점들이 이번 사고가 인재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이유들이다.

이정호 기자 r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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