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하는 한국 정치, 인문학적 사고가 절실하다
[김진희 노무법인 벽성 대표]
인간본성은 철학자들의 오랜 탐구 주제다.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이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인간의 조건'을 탐구한 철학자다. 그는 인간은 생명, 세계성, 다원성이라는 제한된 조건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전제한다. 그 중에서 다원성을 인정하고 드러내는 공적 영역의 삶인 '정치 활동'이 인간을 보다 인간답게 한다고 한다.
민주정치의 핵심을 외면한 폭력정치
당장의 한국 정치를 떠올리며 지레 고개부터 내저을 이가 많을지 모르겠다. 세계정세와 복잡하게 맞물린 나라경제가 안 그래도 힘든 시기에 어처구니없는 레고랜드 사태로 경제가 휘청거린다. 이 망나니 식 정치의 끝은 과연 어디인가. 터져 나오는 한탄들처럼 정치가 경제를 아무 이유 없이 망치고 있다. 복지도 마찬가지다. 생계형 일자리인 공공형 노인일자리가 축소됐다. 정부는 물난리로 드러난 반 지하 주택의 삶을 개선한다면서 공공주택 예산을 오히려 삭감했다.
서울시 인권위 출범이 7개월째 지연되는가 하면, 새로 들어선 지방정부들에서는 민주시민지원센터, 민주시민교육지원조례, 인권위원회의 폐지·축소 움직임이 나타난다. 결국 시민 중심의 인권·교육 활동마저 후진하는 모습이다. 심각성을 인식한 인권 담당공무원들이 집단행동을 모색하고 있다는 소식까지 들린다.
아렌트가 말하는 정치란 조건 지워진 삶을 사는 인간들이 서로 다원성을 인정하고 드러내며 발휘했던, 고대 그리스 폴리스를 염두에 둔 정치다. 즉 '소통'과 '다원성'이 핵심이다. 불행히도 우리사회에선 모두 실종된 단어다. 끝 모를 극단으로 치닫는 우리사회에 아렌트적 사유가 더 절실해지는 이유다. 그 절실함마저 놓아 버린다면 이 몰상식의 사회를 어찌 살아낼 수 있겠는가.
눈앞에서 벌어진 일도 못 본 척하는 정치인이 많다. 막말과 욕설은 발뺌하면 그만이고, 오늘 뱉은 말을 내일 뒤집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위풍당당한 정치인의 모습이 일상화 되었다. 사회적 파장을 일으킬 심각한 발언을 하고도 수정하고 수습하려하기는커녕, 오히려 상대를 공격해 자기 이익을 관철해가는 용감한 정치인들의 행태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들에게 심각한 건 거짓말보다 문해력 수준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우리가 알고 있는 거짓말은 양심을 속이고 상대를 속이는 전형적인 사기형 거짓말이다. 그러나 많은 국정 책임자들과 정치인들에게 양심은 수정해버리면 그만인 것이니, 자신들과는 무관한 것인 양 행동하는 뻔뻔함이 도를 넘었다. 이처럼 거짓이 당당해짐에도 세상은 속수무책이다. 그 뻔뻔함 뒤에 정치적, 경제적 힘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결국 우리 사회를 반추해봐야 한다.
우리는 왜 살인적 경쟁 대열에서 헤어나지 못할까
우리는 물질적 실리를 방해하는 어떤 것도 용서되지 않는 긴장된 사회에 살고 있다. 경쟁체제가 가속화된 시기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발 경제충격 이후부터다. 사회적 안전망이 없던 당시의 고통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혹독했던 그 겨울의 기억은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를 유행시켰을 정도로 돈을 숭배하는 분위기로 우리 사회를 이끌었다. 인생 모토가 부자 되는 것임을 예견한 신호였다. 이제 자산 가치 뻥튀기의 대중적 수단이 된 부동산 투기 요령에 둔감하면 바보 취급당하는 시대가 됐다.
국가가 위기로부터 지켜주지 못하니, 국민들은 이처럼 통렬한 자기반성과 함께 각자도생의 삶을 단련해야 했다. "밥 먹었니?" 라는 인사가 서로의 끼니를 걱정했던 빈궁한 시절의 인정어린 인사였다면, 그런 빈궁을 겪고도 돈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유행시킨 인사가 "부자 되세요"였다. 그런데 부자 되는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타인의 끼니 걱정도 사라져갔다. 모두가 경쟁 상대인데 누가 누구의 끼니를 걱정할까. 이처럼 팽팽한 대열에서 이탈할까 노심초사 살아가는 지금 세대들에게서 그 경쟁적 규칙조차 빼앗는 거짓말, 막말의 행태들은 사회의 긴장감을 더욱 증폭시키며 사람들로 하여금 타인의 아픔에 신경 쓸 겨를조차 빼앗고 있다.
샌드위치 소스 배합기계에 빨려 들어간 청년의 죽음을 통해 드러난 SPC의 잔인한 행태가 맹렬한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이미 타인의 피와 목숨 값으로 체제를 지탱하고 있다. 한해 2000명 넘는 목숨들이 산업현장에서 갈리고 찢겨 사라지고 있다. 청년자살, 노인자살 소식에서 보듯 자살률 세계 1위라는 극단의 수치들에도 우리 사회는 이제 둔감하고 무심하다.
민주정치의 핵심을 놓친 정치와 정부들
지난 문재인 정부는 국민의 삶을 개선하려 나름 노력했다. 그러나 중요한 정책들은 거듭 실패했고 국민들도 거듭 실망했다. 이유는 명백했다. 바로 대화와 설득, 합의의 과정을 경시했고, 정책 사각에서 소외된 부분들을 지원할 치밀한 장치와 피드백을 경시한 탓이다. 이런 '과정'들이 민주정치의 진짜 핵심임을 문재인 정부는 이해하지 못했다. 철저히 경쟁적 삶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 사이에 형성된 극도로 예민해진 이해관계를 너무 쉽게 간과하는 실수를 반복했다. 나는 이런 '과정'들이 생략된 정책 실행을 통렬히 비판한 적이 있지만 정책 방향성에서만큼은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과정'이라는 단어 자체가 아예 사라졌다. 새 정부는 매사가 임기응변이요, 과정에 대한 인내도 생각도 없어 보인다. 어린이의 막무가내 식 '땡깡'을 어른에게서 보고 있자니 국민 피곤함도 한계치에 왔다. 급기야 고등학생의 만평 한 컷에까지 정부가 대응하는 등 자유로운 의사소통에의 위협도 마다하지 않는다. '과정'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자체가 몰염치하게 느껴질 정도다.
인간 사회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명료하지 않고 그럴 수도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건, 사고의 서사를 펼치며 살아가는 시간의 공간이다. 그런 공간에서 서로에 대한 배려와 타협의 과정이 없다면 어떨까? 그런 과정들이 생략된 극단의 상태가 바로 전쟁 아닌가. 인간의 모든 사유가 정지된 그곳에는 오직 죽여야 할 적군만 존재한다. 바로 지금의 한국정치가 그렇다. 상대를 향한 타협의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는 정치인과 관료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정치와 국민의 삶이 달라지려면 이해력이 필요하다. 그 이해력은 인문학적 사고에서 나온다.
인문학적 사고의 결핍이 부른 극단화된 사회
얼마 전 이광형 카이스트 총장이 모 방송에서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의한 적이 있다. 이 총장 강의의 골자는 인공지능(AI)이 지배할 세상에서 이를 컨트롤할 기준이 없다는 건 위험한 일이며, 인문학적 사고를 길러야 과학기술 발전의 기준과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는 취지의 내용으로 기억한다. 이 총장은 그런 이유로 카이스트 커리큘럼에 인문학 과목을 개설했다고 한다.
인문학을 생략해도 되는 학문쯤으로, 대학교육을 취업의 도구로만 이해하는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국민들 우려가 깊다. 관계, 과정, 인과 등 복잡한 맥락들은 알고 싶지 않고, 오직 이 순간 하려는 걸 밀고 가면 된다는 식의 국가 운영에서 미래 전략과 장기 계획이 나올 수 있을까? 그저 명령을 따르는 무심한 복종만이 있을 뿐이다. 인간 사유가 정지된 나치 치하에서 유대인 대량학살을 경험했던 아렌트는 다양성이 원천봉쇄 되는 이런 전체주의적 사고를 경계했다.
우리는 IMF라는 혹독한 경제 충격 시기에 사회 안전망이 얼마나 중요한지 경험했다. 위기 시에 함께 연대하지 않으면 모두가 위험해진다는 사실도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며 학습했다. 사회가 위기에 대응하려면 인문학적 상상력이 사회에 풍부해야 한다. 인문학적 사유가 정지된 기능적 사고로는 위기에 대응하기 어렵다. 인간 심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AI가 지배하는 세상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혹독했던 산업화 시대 논리를 딛고 이제 인간다운 삶을 고민할 때
인문학적 사유의 중요성은 외국 사례에서 확인된다. 얼마 전 '스웨덴은 말한다: 도서관은 민주주의의 기지(☞바로 보기)'라는 <프레시안> 기사를 읽으며 희망의 씨앗을 보았다. 시민사회에서 다양한 의제들이 제안되고, 논의되고, 다듬어지면 집행부서나 의회가 이를 논의하면서 새로운 개선안이 만들어지는 북유럽 사회에 대한 얘기다.
북유럽 나라들에서 보이는 이런 힘의 원천이 바로 도서관이란다. 스웨덴에서는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도시로 몰려든 노동자들이 책 읽는 모임을 조직해 도서관을 중심으로 청년 책모임과 같은 모임들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길러진 높은 시민의식으로 스웨덴 시민은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힘을 길러왔으며, 이에 따라 국가와 시민 간에도 서로를 존중하고 협력하는 문화가 정착했다. 그런 사회적 신뢰가 오늘의 북유럽 사회를 지탱한다.
도래할 미래사회에서 기술과 인간 간의 관계 설정을 고민하며 인문학의 중요성을 설파했던 한 과학자의 우려가 무색하게도, 우리 사회를 보면 이미 각자 다른 별에서 살다온 사람들이 모인 듯 서로 대화가 어렵다. 혹독한 식민지 시대와 전쟁을 겪어낸 폐허의 땅에서 우리는 절박했던 지난 60~70년대에 지금의 근사한 기계장치 대신 망치를 들고 동료들과 함께 산업을 일궜다. 이후 베이비부머 세대는 민주화와 신자유주의적 경제기반을 닦으며 달려왔다.
인권이 무엇인지조차 배울 수 없을 정도로 거친 삶이 존재하던 당시 우리 사회에도 서로 지켜야할 도리나 감내할 규칙이 있었다. 서로를 이해하는 유대감이 있어서다. 삶의 중요한 과정들이 모두 생략된 채 그럴듯한 외피만 두른 지금 우리 사회의 '공정'은 어떤가. 권력자들이 황당한 막말을 쏟아내며 외치고 있는 그 공정은 권력을 따라 허약하게 움직이며 우리의 경쟁적 삶을 더욱 부추길 뿐이다.
이제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영영 포기해야 할까? 우리 사회를 점점 괴물로 만드는 집단 간 갈등과 신자유주의적 틀에 갇힌 공정 담론을, 분노를 넘은 절망의 표현인 수많은 자살과 타살, 그 결과로 나타나는 인구절벽 현상을 그저 모른 척 살아야 할까? 이 문제들을 극복하는데 인문학, 철학적 사고의 확장 없이는 요원하다. 깊은 인문학적 사고가 우리사회에 절실하다.
[김진희 노무법인 벽성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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