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의 보수 회귀, 멀어지는 중도 민심 [유창선의 시시비비]
강경보수 막말로 참패한 2020년 총선의 교훈 벌써 잊었나
(시사저널=유창선 시사평론가)
"북한을 따르는 주사파는 진보도, 좌파도 아니다. 적대적 반국가 세력과는 협치가 불가능하다." 10월19일 국민의힘 원외 당협위원장들과 만난 자리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했던 말이다. 미리 준비된 얘기는 아니고 어느 참석자의 말에 응답하면서 나온 말이었지만, 맥락 모를 생뚱맞은 발언으로 받아들여졌다.
지금 대통령이 언급해야 할 정도로 '주사파' 문제가 이슈가 되는 일도 없고, 대통령이 정색을 하고 말할 정도로 '주사파'가 의미 있는 세력으로 존재하는지도 의문이기 때문이다. 마치 더불어민주당과 강성 지지층이 반대편 세력을 공격할 때 걸핏하면 '친일파' 프레임을 들이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민주당 진영의 '친일' 프레임이 지지층 결집을 노린 것임과 마찬가지로, 윤 대통령의 '주사파' 발언도 전통적 보수층의 지지를 결집시키기 위한 발언이라는 해석으로 연결된다.
작심이라도 한 듯 연이어지는 부적합 인사
근래 들어 윤 대통령의 우향우 행보가 심상치 않다. 도드라지게 나타나는 것이 '강성 우파' 인사들의 중용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 9월 전희경 전 새누리당(국민의힘의 전신) 의원을 정무1비서관에 임명했다. 전 비서관은 의원 시절 '보수의 잔다르크'라고 불릴 정도로 강경하고 전투적인 우파 정치인이었다. 하필이면 국회나 야당과의 소통을 담당하는 자리에 그런 강성 우파 인사를 기용했으니 어떤 신호인지 알 길이 없었다.
이어서 윤 대통령은 김문수 전 경기지사를 경제사회노동위원장에 임명했다. 김 위원장은 보수단체들의 집회에서 태극기를 들고 단상에 올라 '박근혜 탄핵 반대'를 함께 외치던 정치인이다. 국민들에게는 태극기부대와 함께하는 극우 정치인으로 인식되고 있다. 실제로 김 위원장은 "문재인은 총살감"이라고 했던 자신의 과거 발언에 대해 "여전히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고 답했다. 국정감사장에서는 "문 전 대통령이 신영복 선생을 가장 존경하는 사상가라고 여긴다면 김일성주의자"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정진석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그런 발언을 감싸며 "문 전 대통령이 김일성주의를 추종하는 사람이 아닐까 의심하는 사람이 김문수 한 사람뿐인가"라고까지 했다. 이쯤 되면 김문수 개인의 문제가 아닌 윤석열 집권 세력의 문제가 된다. 역시 하필이면 노사정의 사회적 대화를 이끌어야 할 자리에 극단적 성향의 인물을 중용했으니 이 또한 맥락을 이해하기 어려운 인사였다. 당장 한국노총은 "김문수 위원장의 행태는 시대착오적"이라며 "정치적 문제에 대한 편파적 입장을 대내외에 반복적으로 표방하는 것은 경사노위 위원장으로 부적절한 처신"이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여기에 이은재 전 자유한국당(국민의힘의 전신) 의원을 전문건설공제조합 새 이사장 후보로 낙점한 사실은 차라리 한 편의 블랙 코미디다. 국회의원 시절 내내 자질 논란이 계속되었고 '사퇴 요정'으로 불리며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던, 게다가 아무런 관련 전문성도 없는 인사를 내려보내는 최악의 낙하산 인사가 된 것이다. 어쩌다 한 번 실수한 것도 아니고, 작심이라도 한 듯이 연이어지는 부적합 인사들을 보노라면, 윤석열 정부는 이제 중도 확장성을 포기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북한의 잇따른 탄도미사일 발사에 맞서 여권 내부에서 '전술핵 배치' 목소리가 이어진 것도 위험천만한 일이다. 북한의 핵무장에 대한 우려가 심각한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 정부도 부정적 입장인 전술핵 배치로 대응하는 것은 한반도에서 핵무장 대결을 낳는 위험한 길이 될 수 있다. 국민의힘 안팎에서 이어지는 전술핵 배치 주장은 과거 강성 보수 정치인들의 목소리와 다르지 않다.
근래 들어 윤 대통령과 여권 세력이 보여준 이런 일련의 행보들은 일시적이거나 우연한 것이 아니라, 나름의 전략적인 구상 위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판단이 든다. 지지율 하락 속에 보수층의 이탈까지 나타난 상황에서, 일단 강경 보수 노선을 통해 전통적 보수층을 결집시키려는 판단을 했을 법하다. 만약 그렇다면, 이는 하나만 생각하고 둘은 생각하지 못하는 단견이다. 윤 대통령을 만들었던 것은 전통적 보수층의 지지로만 가능했던 것이 아니다. 민주당의 '내로남불'과 진영 정치에 등 돌린 중도층이 윤 대통령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대통령 당선이 가능했던 것이다. 윤석열 정부가 성공한 정부가 되려면 대선 득표율보다도 더 확장적인 지지를 얻기 위한 중도 강화 노선으로 가야함은 상식적인 판단이다.
다시 둘로 쪼개진 주말 도심…책임은 尹의 몫
그런데 눈앞에서 이탈한 보수층만 바라보다가 중도 민심은 포기하고 우파 세력의 지지만 받는 길을 간다면, 이는 21대 총선 시절 보수 정당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길이 된다. 2020년 총선 당시 미래통합당(국민의힘의 전신)은 황교안 전 대표 체제의 후과에다 강경보수 후보들의 막말 파문이 이어지면서 자멸하다시피 참패했다. 그로부터 지난 3·9 대선에서 승리하기까지 보수 정당 세력은 중도 확장성에 모든 것을 걸다시피 해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강경보수로 회귀하는 듯한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 지도부의 모습은 그동안 공들였던 탑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이다.
윤 대통령의 보수 회귀 행보는 여권의 22대 총선 패배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물론 여권은 자신들의 지지율이 수렁에 빠졌어도 민주당의 '이재명 사법 리스크'를 최후의 보루로 기대할 것이다. 이 대표에 대한 중도층의 비호감 정서가 여전한 상태에서 민주당이 '이재명 방탄'에 올인하다가는 민주당도 국민에게 외면당하는 상황을 내다볼 수 있다. 그러나 자력으로 만들어낸 지지가 아니라 '반이재명' 정서라는 반사이익에 기댄 여권의 미래 구상은 모래 위에 쌓은 성일뿐이다.
요즘 주말이면 서울 도심이 다시 둘로 쪼개지고 있다. 보수단체의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이재명·문재인 구속'을 외치고, 진보단체의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윤석열 퇴진·김건희 특검'을 외친다. 조국 사태 이래로 나라가 둘로 쪼개지는 분열의 터널을 고통스럽게 거쳤건만,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 불과 반 년 만에 다시 그런 광경이 재현되는 모습이다. 결국 윤석열 정부가 통합을 이루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 강경으로만 치닫는 민주당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 한 협치라는 구호가 공허한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분열과 갈등의 최종 책임은 집권 세력에게 묻는 것이 정치다. 선택의 열쇠는 윤 대통령의 손에 쥐어져 있다. 중도 민심을 포기하다가 식물정부로 끝나고 말 것인가, 이제라도 중도 확장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 다음 총선에서는 다수당이 되고 안정적인 국정 운영의 길로 가려 할 것인가.
윤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이 있던 10월24일, 정의당의 이은주 비대위원장은 사전 환담에서 윤 대통령에게 '비속어 발언 논란'에 대한 사과를 요청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사과할 일은 하지 않았다"며 이를 일축했다. 김진표 국회의장도 시정연설을 앞두고 윤 대통령이 사과해줄 것을 여권 쪽에 여러 차례 요청했지만 무위로 끝났다고 한다. 비속어 발언이 그렇게 대단한 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한사코 사과할 수 없다는 윤 대통령의 고집도 달라지지 않는다. 뭣이 중헌지, 윤 대통령에게는 생각의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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