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카페] 이태원 참사, 파도처럼 몰린 군중이 질식 불러
현장 대응보다 예방책이 최선
밀집 공간 행동부터 연구해야
출구 앞에 있어도 시야 가리면 못 가
서울 이태원 압사 참사는 과거 전 세계에서 발생한 유사 사고처럼 좁은 공간에 밀집된 군중이 제때 빠져나오지 못해 일어났다. 과거 사고 사례를 연구한 전문가들은 현장 대응으로는 사고를 막지 못하고 예방이 최선이라고 조언했다. 군중 행동 예측 연구를 통해 미리 예방책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질식 유발
과학자들은 이번 이태원 참사를 ‘군중 밀려듦(crowd surge)’으로 묘사했다. 영국 서퍽대의 키스 스틸(Still) 교수는 31일 미 워싱턴포스트지 인터뷰에서 “좁은 공간에 사람들이 밀집할 때 군중 밀려듦이 발생한다”며 “이는 결국 ‘도미노 효과’처럼 연이어 사람들이 넘어지게 한다”고 말했다. 좁은 공간으로 파도가 밀려들면서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것과 같다. 일종의 군중 파도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군중 쇄도(crowd stampede)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은 같지만 일정 간격을 두고 달리기 때문에 이태원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스틸 교수는 군중 밀려듦 동안 발생하는 압력은 폐가 호흡을 위해 팽창할 공간을 없애고, 이 상태로 6분이 지나면 질식 상태에 빠진다고 밝혔다. 사람은 30초만 뇌에 피가 통하지 않으면 정신이 몽롱해진다.
스틸 교수는 앞서 2012년 발표한 보고서에서 밀집도가 1㎡(제곱미터) 면적 당 사람 수가 4~5명을 초과하면 혼란 상태가 빠르게 축적되며, 특히 지면이 평평하지 않은 경우에는 더 발생할 위험이 높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영상을 보고 이태원에서는 1㎡당 8~10명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군중 파도는 여러 요인에 의해 촉발될 수 있다. 이태원 참사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누군가 미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스틸 교수는 “이태원 사고는 조난 상태에 빠진 사람이나 빠져나오려고 밀치던 사람이 유발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런 반응은 이미 군중이 무너진 다음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은 패닉에 빠져 죽는 게 아니라 죽어 가면서 패닉에 빠진다”고 했다.
또 다른 군집 행동 전문가인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의 메흐디 무사이드(Moussaid) 박사는 외신 인터뷰에서 “이태원 사고는 엄청난 일이지만 특이한 경우는 아니다”라고 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서 성지 순례를 하면서 수백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문제는 이태원 참사는 콘서트나 성지순례와 달리 사람이 얼마나 올지 전혀 알 수 없는 계획되지 않은 행사라는 점이다. 그 점에서 이태원 현장에 아무리 경찰이 많이 있어도 사고를 막지 못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시뮬레이션으로 군중 행동 예측
결국 중요한 것은 사고 현장의 대응보다 예방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예를 들어 메카 성지순례에서는 무조건 일방통행을 해야 한다. 그래야 인파가 물결처럼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반면 이태원 골목에서는 양쪽으로 인파가 다닐 수 있어 위험을 증폭시켰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대형 압사 사고를 막으려면 사람들의 동선(動線)을 예측해 통로나 출입구를 적절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군중 파도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밝히는 연구도 중요하다. 대표적인 방법이 컴퓨터 시뮬레이션(가상실험)이다. 사람을 하나의 입자로 보고 통로나 출입구에 몰리는 상황을 물리학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뮬레이션 결과는 실제 상황과 많은 차이를 보였다. 수많은 요인이 관여하는 사람의 행동을 단순한 입자의 움직임만으로 해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시각(視覺)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단서를 찾았다.
지난 2011년 스위스 연방공대의 디르크 헬빙, 당시 프랑스 폴 사바티에대의 메흐디 무사이드 박사 공동 연구진은 ‘미 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한 논문에서 “컴퓨터 시뮬레이션에서 사람이 서로를 볼 수 있다고 가정했더니 군중 행동이 실제 상황과 거의 같아졌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2010년 대형 압사 사고들이 잇따라 발생한 것을 계기로 연구를 했다. 그해 캄보디아의 한 축제 현장에서 400명 가까운 사람들이 다리 위에서 압사당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독일 뒤스부르크에서는 세계 최대 테크노 댄스축제 ‘러브 퍼레이드’에서 최소 19명이 사망하고 340여명이 다치는 압사사고가 일어났다.
연구진은 대형 압사 사고를 시뮬레이션에서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 사람들은 시선을 따라 가장 덜 복잡한 곳으로 움직인다는 가정을 했다. 이를테면 나와 출구 사이를 한 사람이 가로질러 가고 있다면 그 사람이 가는 쪽이 아니라 반대쪽으로 가도록 걷는 속도를 조절하는 식이다. 출구가 바로 앞에 있어도 바로 가지 못한다는 말이다.
무사이드 박사는 그동안 연구 결과를 토대로 좁은 공간에 군중이 몰릴 때 대처법도 제시했다. 그는 2019년 호주의 과학 매체인 ‘컨버세이션(The Conversation)’에 “좁은 공간에 사람이 몰리면 가능한 바로 서야 하며, 폐가 있는 부분을 보호하기 위해 팔을 가슴 높이로 유지해야 한다”며 “산소 부족으로 인한 질식 위험을 낮추기 위해 비명을 지르는 것도 자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문은 좁게, 문 사이 간격은 넓게
군중 밀집 사고를 막기 위해 인공지능(AI)도 이용한다. 2019년 독일 항공우주센터(DLR) 연구진은 AI로 사람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특정 장소에 모인 사람 수를 측정했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군중을 찍은 항공, 지상 사진 33장을 인공지능에게 입력했다. 그 결과 인공지능은 사람이 추산한 것보다 15% 정확하게 사람 수를 알아냈다. 속도도 불과 0.03밀리초(1밀리초는 1000분의 1초)만에 1㎡당 사람 수를 알아냈다.
동물실험도 군중 행동 예측에 쓰인다. 2001년 필리핀 연구진은 방에 물이 차오를 때 생쥐들이 어떻게 문으로 빠져 나가는지 실험을 했다. 압사 사고를 막으려면 출구를 더 넓게, 그리고 가능한 한 많이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험 결과는 달랐다.
문은 생쥐 한 마리만 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고, 대신 문들 사이의 간격은 넓어야 안전한 대피가 가능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테면 문의 폭이 좁으면 한 사람씩 줄지어 나가지만 문이 넓어지면 한꺼번에 몰리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 문의 폭이 적당해도 문들 사이 간격이 좁으면 역시 같은 혼란이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에서도 군중이 좁은 공간에 몰리면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을 제기하는 연구들이 있었다. 지난 2011년 왕순주 한림대 응급의학과 교수는 한국재난정보학회논문집에 국내외 사고 사례를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국내외에서 대형 군중 사고가 잇따르던 상황이었다. 연구진은 군중 눌림 현상은 날씨와 연령, 실내외 여부 등 다양한 변수에 영향을 받는다며, 인간 신체와 관련된 여러 외부적 영향에 대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었다.
참고자료
PNAS, DOI: https://doi.org/10.1073/pnas.1016507108
PNAS, DOI: https://doi.org/10.1073/pnas.2031912100
arXiv, DOI: https://doi.org/10.48550/arXiv.1909.12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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