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kg을 수시로 들며 일했던 SPC 여성노동자
에스피씨(SPC)그룹 계열사인 에스피엘(SPL)의 경기도 평택공장에서 숨진 박아무개씨가 담당했던 소스 배합 업무는 “가장 힘든 공정”(강규형 민주노총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화섬노조) SPL지회장)으로 꼽힌다. 박씨는 샌드위치에 들어갈 소스를 만드는 작업을 하다가 혼합기에 빨려 들어가 숨졌다.
다른 배합 담당자는 들지 못할 정도
물에 정백당과 천일염을 넣고 녹을 때까지 섞는다. 녹으면 와사비(고추냉이) 분(가루)을 넣고 섞는다. 이후 마요네즈, 간장, 머스터드를 넣고 덩어리가 없도록 섞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소스를 ‘크래미’(게살류)가 풀어진 반죽기에 먼저 처리된 옥수수와 함께 넣고 섞다가 이후 파인소프트(식품첨가물 가루)를 뭉치지 않게 넣고 완전히 섞일 때까지 교반(휘저어 섞음)한다.(‘SPL 평택공장 산재사망사고에 대한 법률 검토 의견서’)
박씨가 맡았던 소스 제조 공정은 이런 순서로 진행된다. 강 지회장은 “여러 재료를 계속 넣어야 할 뿐 아니라 완성된 무거운 소스통도 층층이 쌓아 올려야 하기 때문에 3인1조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씨와 같은 ‘냉장 샌드위치’ 제조 공정에서 근무하는 노동자 ㄱ씨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배합할 수 있는) 다른 근무자는 50대인데다 작은 체구라 소스통을 들고 배합하는 일이 힘들어 재해자(박씨)가 주로 배합 일을 했다. 배합으로 소스를 만들 때 ‘바트’(스테인리스 용기)라는 용기를 사용하는데, 바트 한 개의 무게는 최소 20㎏ 이상이고 노란 상자에 담긴 재료는 더 무거워서 여자가 들어서 배합하기는 무척 힘들다. 그래서 배합실을 지나가다가 (내가) 가끔 바트를 들어 교반기에 부어주는 등 도와준 적이 있다.”
이 공정의 노동강도에 대해 비슷한 또 다른 진술도 있다. “배합 업무 특성상 중량물을 많이 취급한다. 배합에 필요한 각종 원료를 1층에서 2층으로 나르는 작업 중 오른쪽 팔이 평소보다 근력이 다소 부족한 느낌을 받았고, 시간이 경과되면 나아질 것으로 생각하고 계속 업무를 수행했으나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박씨와 마찬가지로 SPL 공장에서 주야 2교대 배합사로 근무하다가 2020년 어깨 인대가 파열되는 재해자가 된 30대 남성노동자의 말이다. 이은주 정의당 의원이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에서 받은 ‘최근 5년간 SPC그룹 계열사의 산업재해 현황’에 기록된 진술이다.
가슴 높이 혼합기에 직접 손을 넣어 휘젓기도
12시간 주야 맞교대, 2인1조 작업조차 이뤄지기 힘들 만큼 인력이 부족한 근무환경, 안전 교육·설비가 없거나 부족했던 관행 등 SPL 공장의 노동환경은 총체적 문제점을 드러낸다. 다만 여기서 한 발 더 들어가서 생각해볼 지점도 있다. 청년 남성노동자도 부상당할 만큼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왜 여성노동자가 홀로 맡아야 했는가. 박씨의 몸이 빨려 들어간 혼합기 같은 기계설비, 작업장 환경은 노동자의 성별 차이를 고려해 성인지적 관점에서 설계됐는가.
“통상 한국 노동시장의 성별 분리는 남성에게 (신체적으로) 힘든 일을 시키고 월급을 많이 주고, 여성은 콜센터나 단순 조립공장처럼 상대적으로 (물리적) 힘을 안 쓰는 일을 시키면서 저임금을 주는 형태다. 두 곳 모두에서 환자가 생긴다. 그런데 SPL 공장의 경우 예외적으로 힘을 쓰는 작업에 여성이 투입된 건데 힘은 힘대로 쓰면서 저임금을 지급하는 착취 형태다.” 한인임 ‘일과건강’ 사무처장은 “가장 악독한 착취 구조를 갖고 있다”고 짚었다. 실제로 SPL 공장에서 2년9개월가량 매일 12시간씩 일했던 박씨가 받은 한 달 임금은 주간 근무 기준 200만원에 못 미친다. 야간 근무 수당을 더해야 월 270만원대까지 올라간다. 화섬노조 관계자는 “(나는) 5년차인데 시급이 1만471원으로 최저임금(9160원)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연차를 고려하면 박씨는 이보다 더 적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SPL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1158명으로 남성(729명)과 여성(429명)이 6 대 4 정도 된다(2021년 사업보고서). 하지만 제작 환경이나 공정에서 성별에 따라 달라지는 부분은 없다. 미국 응용생리학저널에 실린 논문 ‘18~88살 남녀 468명의 골격근량 및 분포’(2000년)에 따르면, 평균적으로 여성의 상체 근육은 남성에 견줘 40%, 하체 근육은 33% 적다. 기계설비도 신체 차이를 고려하지 않는다. 사고가 일어난 혼합기는 높이 105㎝, 가로세로 90㎝ 정도 크기다. 키가 160~165㎝쯤 되는 박씨는 가슴 높이의 혼합기 안에 직접 손을 넣어 소스를 젓는 작업 등을 하기도 했다.
한인임 사무처장은 “사람에게 기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기계에 사람을 맞추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해당 혼합기가) 비교적 최근에 들어온 설비인데 여성노동자가 다수 일하는 곳임을 고려하면 (여성의 몸에 맞춘) 다른 규격의 설비가 가능했는지도 함께 고려했어야 한다. 적절한 기계를 들여올 수 없다면, 대규모 빵공장을 운영하는 회사인 만큼 자체적으로 안전성이 담보된 기계를 제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기계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작업복도 비슷하다. 화섬노조 관계자는 “작업용 위생복은 크기가 다양하게 있지만 (끼임 위험성이 있는) 앞치마는 모두 동일한 걸 쓴다”고 말했다.
10명 중 1명꼴로 생리불순, 난임, 유산
SPL 공장뿐만 아니라 SPC그룹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문제다. 김유정 노동건강연대 활동가는 “대다수 보호장비는 ‘표준 미국 남성’을 기준으로 만들어지기에 이를 일방적으로 전체 노동자에게 지급한다면 착용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며 여성용 분진 마스크를 지급하고 여성 제빵기사의 키에 맞는 작업대를 제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제빵기사가 작업하는 작업대가 남성 중심으로 제작돼, 여성 제빵기사들에게는 높이에 따른 근골격계질환이 더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파리바게뜨 여성노동인권’ 토론회, 2022년 7월12일)
파리바게뜨 제빵기사의 80% 이상은 여성이다. 2022년 6월 파리바게뜨 제빵기사 297명에게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절반(49.6%)이 근골격계질환을 겪고 있었다. 20.7%는 밀가루 등 분진으로 인한 호흡기질환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10명 중 1명꼴로 생리불순, 난임, 유산을 겪었다고도 응답했다. 응답자들의 유산율은 41.7%로 여성 직장인 평균 유산율(23%)보다 높았다.
더구나 SPC그룹의 여성노동자는 임금, 근속기간 등에서 차별을 겪고 있었다. 대표 계열사인 SPC삼립의 성별 임금격차는 44.3%(2021년 12월, 사무·점포 노동자 기준)다. 여성이 남성보다 임금을 절반 가까이 적게 받는다는 뜻이다. 한국 평균 성별 임금격차인 31.1%(2021년 기준)를 훌쩍 뛰어넘는다. 이 회사의 여성 평균 근속기간(2021년 12월, 사무·점포 노동자 기준)은 4년2개월로 남성(7년9개월)의 절반에 불과하다.
산업안전보건 분야에서 성인지적 관점을 반영하도록 권고하는 것은 국제적인 추세다. 국제노동기구(ILO)의 산업안전보건정책 가이드라인은 “산업안전보건 관련 법령은 남성과 여성을 동등하게 보호하기 위하여 이들의 생물학적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사업주가 안전보건 관리, 위험 예방 활동을 할 때 성별 차이를 고려하도록 명시해야 한다”고 돼 있다. 유럽연합(EU) 산업안전보건기구 역시 가이드라인에 “여성근로자를 위한 적절한 개인 보호구를 설계하고 홍보함으로써 부적절하고 잘 맞지 않는 장비를 사용해 발생할 수 있는 안전 위험을 줄일 수 있다”고 규정했다.
독일의 산업안전보건법 제4조 8항은 여성이 작업 과정에서 사업장 내 안전보건 조치에서 배제되거나 차별을 받지 않도록 하는 규정을 뒀다. 스웨덴 정부는 노동환경청 조사 결과 근골격계질환 때문에 은퇴하는 여성 비율이 남성보다 높다는 점이 드러나자, ‘여성의 작업환경’을 개선하는 일을 정책과제로 할당했다. 이에 따라 노동환경청은 기업 717곳을 집중 근로감독 하고, 성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해 사업주·근로감독관 등을 교육했다. 오스트리아는 산업안전보건 관련 노동자 대표자를 선정할 때 성별 비율을 함께 고려할 것을 시행령에서 못박았다.
여성 근골격계질환 유병률이 높았을 때 스웨덴의 조치
반면 한국의 산업안전보건법은 산업재해를 예방하거나 위험성을 평가하는 것과 관련해 성별 차이나 특성을 고려할 의무를 따로 규정하지 않는다. 산업안전보건기준규칙 역시 노동자의 신체에 적합한 보호구여야 하는지 언급하지 않는다. 산업안전보건위원회를 구성할 때 성별 균형을 명시한 내용도 없다. 여성노동자의 산업안전 관련 요구를 반영하기 어려운 셈이다.
노동환경에서 성별 차이를 고려하라는 여러 나라의 규정은 ‘여성은 안전한 일, 남성은 위험한 일’을 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여성에게 안전한 작업장이라면 모두에게 안전한 작업장이 될 수 있어서다. 한 사무처장은 “성인지적, 장애인 인지적 노동환경을 만들라고 하는 것은 이들이 근무하기에 충분히 안전한 작업환경을 만들라는 의미다. 이들을 기준으로 작업환경과 공정을 설계한다면 비장애인, 남성도 당연히 더 건강하게 일할 환경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참고 자료
-‘SPC 파리바게뜨 평택공장 SPL 산재사망사고 중간보고서’(2022년 10월25일)
-‘SPL 평택공장 산재사망사고에 대한 법률 검토 의견서’(2022년 10월25일)
-‘파리바게뜨 여성노동인권 개선 방안 모색을 위한 토론회 자료집’(2022년 7월12일)
-‘산업안전보건법에 대한 성인지적 관점의 검토와 개선방향’(구미영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 <노동법 연구> 53호,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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