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사내들의 '2전 3기' 얼음 뒤덮인 1,200m 암벽 오르다
그랑드조라스Grandes Jorasses는 알프스산맥 몽블랑 산괴에 위치한 산이다. 최고봉은 워커봉Pointe Walker(4,208m)이다. 1868년 6월 30일 H.워커, M.안데렉, J.자운, J.그란지가 초등했다. 그랑드조라스 북벽은 마터호른, 아이거와 함께 알프스 3대 북벽으로 불린다. 많은 등반가들이 찾는 곳이지만 등반 성공 확률이 높지 않다. 날씨에 따라 등반의 성공이 좌우된다. -편집자 주
2012년 마터호른(4,478m)을 등반했을 때다. 그랑드조라스 북벽은 여러모로 준비가 부족해 몽탕베르역Montenvers에서 바라만 봤다. 북벽과의 첫 만남이었다. 2017년 김건 형님과 공영효와 함께 그랑드조라스 북벽을 다시 찾았다. 계속되는 궂은 날씨 때문에 북벽을 등반하지 못하고 프랑스 남부 베르동계곡과 지중해 근처 카시스를 등반했다.
2022년 다시 그랑드조라스 북벽을 찾았다. 이번이 세 번째. 벌써 10년이 흘렀다. 건이 형님과 이형윤도 세 번째다. 영효와 최종화도 함께해 힘을 더한다. 등반에 굶주린 사람들이 모였다.
몽탕베르역으로 가기 위해 버스로 알핀로제에서 샤모니역까지 이동한다. 역에 도착하니 주변이 너무 한산하다. 오전 9시인데 우리가 너무 일찍 도착한 걸까? 확인해 보니 기차선로에 문제가 있어 내일까지 운행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다음 날도 알 수 없다. 당혹감이 몰려왔다. 의논 끝에 북벽 앞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그래도 다들 밝은 표정이다.
샤모니역에서 모테산장Les Rochers Mottets까지 세 시간 반을 걸었다. 메르 드 글라스Mer de Glace 빙하로 가는 길에 500개 정도의 철 계단을 내려간 뒤 레쇼Leschaux산장까지 도보로 4시간을 걷는다. 이후 그랑드조라스 워커봉 초입까지 다시 3시간 반, 총 11시간을 걸어 북벽 앞에 도착했다. 시간은 오후 7시를 넘어선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기 위해 최대한 낙석 위험을 피해서 빙하 위에서 비박을 한다.
낙석 쏟아지는 절벽에서의 비박
새벽 5시. 1피치에서 베르그슈른트 때문에 오른쪽 10m 설벽을 빙벽화와 크램폰(빙벽이나 설사면을 오르기 위해 뾰족한 포인트가 있는 금속 프레임을 등산화에 부착하는 장비)을 착용하고 오른 후 왼쪽으로 트래버스한다. 루트에 현지 등반팀 3명이 오르고 있다. 그 뒤를 따라 스위스팀 두 명, 그리고 형윤과 영효 팀이 이어서 등반한다. 건이 형님, 종화, 나는 맨 뒤에서 워커봉을 향한 행복한 오름짓을 시작한다.
두 번째 피치부터 암벽화로 등반했다. 얼어붙어 있던 돌들이 따뜻한 날씨에 녹으면서 작은 움직임에도 쉽게 떨어진다. 등반자가 많아 낙석에 조심해야 했다. 오늘 늦어도 삼각설전까지 가리라 혼자 다짐해 본다. 형윤과 영효는 50m 로프, 우리는 60m 더블 로프로 등반했다. 내가 선등하고 종화가 후등으로 매달고 온 로프를 고정하면 건이 형님이 고정 로프를 오르는 방식이다. 체력 안배를 위해 오늘은 가급적 천천히 오르기로 했다.
4피치 정도 올랐을까. 형윤과 영효가 왼쪽으로 스위스팀을 앞서가고 있다. 우리는 오른쪽에 슬랩(요철이 없는 경사 70도 이하의 반반한 바위)으로 보이는 곳으로 오른다. 얼음 위에 모래를 뿌려놓은 듯 미끄럽다. 최대한 집중한다. 스위스팀이 확보지점에서 내게 오른쪽으로 올라 위에 캠을 설치하고 건너오라고 도움을 준다. 고마울 따름이다. 다음 피치는 사선으로 트래버스해 등반하는 구간이다.
스위스팀과 잠시 얘기하는 사이 헬기가 우리 머리 위를 몇 회 선회하더니 이내 현지 등반팀 3명을 모두 데리고 샤모니 쪽으로 사라져버린다. 스위스팀 두 명은 이곳에서 하강해 내려간다고 했다. 이제 우리 5명만 벽에 남는다.
마음속으로 하산할 때까지 별일 없기를 빌어본다. 스위스팀과 작별 인사를 하고 심란해진 마음을 붙잡으며 다시 등반을 시작한다. 이미 영효는 오르고 보이지 않는다. 종화를 불러 바로 밑에서 확보를 보게 하고 직상해서 7m쯤 올랐다. 그런데 갑자기 등반 난이도가 높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레뷔파크랙(V+/A0)을 제외하고 전체 루트 중 등반이 어려운 곳은 디에드로(책을 세워서 펼친 모양의 바위 지형), 검은 슬랩, 붉은 침니(몸의 일부나 전부가 들어갈 수 있는 수직 바위틈)이다. 세 곳 모두 아직 멀었는데 싸늘한 느낌이 든다. 잠시 캠에 확보하고 주위를 살폈다. 7m쯤 위로 확보용으로 보이는 슬링이 뚜렷이 보였다. 아차! 사선으로 조금 더 올랐어야 했다. 클라이밍 다운(로프 하강하지 않고 손발을 써서 내려가는 것)해서 다시 직상하니 형윤과 영효가 레뷔파크랙을 등반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다행이었다.
레뷔파크랙에 도착해서 별 생각 없이 크랙을 올랐다. 그런데 한 동작이 발목을 잡는다. 실력이 부족해서 쫄았나보다. 0.2호 캠도 크다. 마이크로 캠이나 너트가 간절히 그리웠다. 몇 번을 시도하다 여기서 불필요하게 힘만 빼봤자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배낭을 벗어 걸어두고 올라간다. 배낭이 없으니 가볍게 오른다. 위에 있는 확보물에 퀵드로를 걸고 내려와 다시 배낭을 메고 올랐다. 이후 등반은 별 어려움 없이 무난하게 올랐다.
시간은 벌써 정오를 넘어선다. 오늘 목표한 삼각설전은 저 멀리 있다. 전체 40피치 중 10피치를 넘어선 상태. 마음만 앞서고 있다. 형윤과 영효가 교대로 디에드로까지 등반을 이어간다. 내가 디에드로에 도착할 즈음 영효는 하단을 등반하고 형윤이가 빌레이(등반자 확보)를 보고 있다. 함께해서 좋은 사람들이다.
한 피치라도 더 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현재의 몸 상태와 비박지를 고려해 검은 슬랩 밑에서 비박하기로 했다. 어느덧 저녁 7시를 넘어서자 검은 슬랩 아래에서 형윤과 영효가 오늘의 마지막 등반을 준비하고 있다. 루트에 눈이 제법 쌓여 있는 것으로 보였고 둘은 열심히 눈을 치우며 등반하고 있었다.
내일을 위해 우리 셋은 밑에서, 둘은 위에서 비박했다. 식수는 눈을 끓여 사용했다. 가끔 고드름과 눈으로 갈증을 해소했다. 다섯 명이 비박하기에는 공간이 부족하다. 각자 최대한 편하게 자리를 잡는다. 낙석 위험이 다소 있지만 전망 좋은 곳에서 길었던 하루의 피로를 씻는다. 밤하늘에 핀 수많은 별과의 동침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기를 바란다.
길 잘못 들었다 추락할 뻔
기다리던 아침이 왔고 무전으로 앞 팀과 교신해서 식사 후 바로 출발하기로 했다. 건조 비빔밥 2개를 셋이서 나눠 먹는다. '오늘은 꼭 정상을 등정하리라'는 굳은 결심을 한다.
두 피치 정도 올랐을까. 검은 슬랩(V+/A0) 앞에 도착하자 형윤이가 힘들게 오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검은 슬랩에 올라와 보니 붉은 침니와 붉은 암탑, 정상 아래까지 눈이 거의 없었다. 검은 슬랩을 지나고 회색 암탑까지 오르자 길이 복잡하다. 사선으로 갈 것인지 능선으로 올라설 것인지 고민했다. 등반선을 잡기 위해 하켄을 찾았으나 잘 보이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등반이 어려워 보이는 구간은 아닌 듯해 사선으로 올라 왼쪽으로 직상해서 능선에 올라섰다. 조망도 좋고 확보지점도 있다. 저 멀리 붉은 침니와 붉은 암탑도 보인다.
회색 암탑은 전반적으로 크랙도 많고 확보지점도 많았으나 하켄 사이의 거리가 멀고 오래된 로프가 많다. 암탑부터 삼각설전까지는 가볍게 올랐다. 형윤은 올라오자마자 발가락 통증으로 힘들어 한다.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안타깝다.
확보지점을 만들어 빌레이를 보고 있을 때 영효가 올라왔다. 급똥의 위급함을 호소하나 나도 어떻게 할 수 없다. 종화가 올라오자마자 붉은 침니를 향해 등반을 시작했다. 두 피치 정도 오르자 붉은 침니가 바로 눈앞에 있다.
침니에서부터 낙석에 더 많이 노출되었다. 각자 알아서 안전하게 올라야 한다. 눈과 얼음이 있는 구간이라 상황에 맞게 빙벽화와 크램폰을 착용하고 등반하는 게 좋아 보였다. 나는 그냥 암벽화를 신고 왼쪽 암릉 구간을 따라 붉은 암탑 앞까지 올랐다. 그런데 여기서 이번 등반의 최대 고비를 만났다.
사실 침니 구간은 눈과 얼음이 있어 빙벽화와 크램폰이면 쉽게 오를 수 있다. 암벽화를 신고 왼쪽 암벽으로 올라온 나는 군데군데 쌓인 눈을 손으로 치우며 조심스럽게 암탑 앞까지 왔다. 그리고 여기서 작은 발 홀드와 크림프 홀드(손가락 몇 마디만 걸칠 수 있는 작은 홀드)에 의지한 채 암탑으로 건너가기 위해 침니로 넘어가려 시도했다. 그런데 아뿔싸. 거리가 멀다. 순간 추락할 것 같았다.
암벽화로는 키킹도 할 수 없고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크림프 홀드는 금방이라도 빠질 것 같았다. 반사적으로 침니 왼쪽의 크림프 홀드를 잡고 빠르게 돌아왔다. 천만다행으로 추락을 면했다.
살았다는 안도감도 잠시, 발 홀드는 손가락 두 마디 정도지만 젖어있어 심리적으로 불안했다. 손 홀드는 크림프이지만 다행히 벽이 누워 있어 버틸 만했다. 확보물은 5m 아래 0.2호 캠과 그 아래 낡은 하켄 하나. 자동으로 추락 계수(등반자가 추락할 때 생성되는 충격력)까지 계산되는 이 기분은 정말 죽을 맛이다.
길게 숨을 내쉬며 요동치는 심장을 진정시켜보려 노력했다. 종화에게 빌레이를 잘 봐달라고 다시 부탁한다. 발 홀드에 물기가 촉촉하다. 발을 비비고 바꾸기를 몇 번, 얼마나 지났을까. 얼음보다 더 반짝이는 은색 하켄이 눈과 어우러져 2m 위 바위틈에서 반짝거린다. 신이시여, 고맙습니다! 종화에게 다시 한 번 세심한 빌레이를 부탁하고 눈과 얼음을 손으로 치우자 조그만 홀드가 나왔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홀드를 잡고 오른다. 하켄에 퀵드로를 걸고 매달렸다. 살았다! 안도감이 밀려왔다.
나와 같은 고난을 겪지 않기를 바라며 후미에게 빙벽화와 크램폰을 착용하고 등반하라고 일러 준다. 오른쪽으로 트래버스 한 뒤 붉은 암탑 앞으로 가서 확보지점에 얼른 확보한다. 긴 한숨과 더불어 그때서야 손가락이 아려오고 발가락이 시려온다. 깨질 듯 아프다.
5분 정도 쉬고 나니 손발이 돌아오고 북벽에 어둠이 찾아온다. 형윤과 영효를 위해 로프 하나를 고정해 줬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비박하기로 하고, 우리는 암탑 앞에서 한 피치를 더 등반해 비박하기로 했다. 나는 최고로 조망이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지만 엉덩이를 반만 걸칠 수 있다. 비박할 때는 신발을 벗고 양말 위에 장갑을 꼈다. 손은 장갑을 낀 채 주머니에 넣고 잤다.
1,000m 벼랑 아래로 떨어진 내 휴대폰
추위에 떨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나니 아침이 찾아왔다. 바람이 참 많이 불었다. 밤을 함께한 전사들을 불렀다. 가자! 식량이 없으니 식사 시간도 없다. 장비를 챙기자마자 무전기 없이 직접 육성으로 교신했다. 날씨가 너무 좋았다.
붉은 암탑을 돌아서 3피치 정도 오르자 정상까지 이어지는 침니가 나타난다. 정상까지 3피치 정도 남은 듯했다. 한 피치를 오르고 확보하는데 낙석이 떨어졌다. 아래를 보고 '낙석!'을 외쳤는데 이상하다. 벽에서 떨어진 낙석이 아니다. 나한테서 떨어진 것 같다. 뭔가 하고 유심히 보니 휴대폰이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하염없이 잘도 내려가고 있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정상이 눈앞이다. 정상만 바라보며 마지막 피치를 기분 좋게 오른다. 그런데 밑에서 로프가 얼마 안 남았다는 소리가 들린다. 5~6m 정도 부족하다. 할 수 없다. 정상 바로 밑 피너클에 슬링과 캠으로 확보했다. 뒤따르던 형윤이는 바로 정상으로 안전하게 오른다. 내가 다 기분이 좋다.
정상 바로 밑에서 멋진 경치를 구경하며 빌레이를 본다. 형윤이가 정상에 오른 시간이 오전 10시 30분쯤이다. 그 뒤를 따라 나, 종화, 영효 그리고 건이 형님이 올랐다. 2022년 8월 3일, 우리들의 작은 소망 하나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모두 다치지 않고 무사히 정상에 섰다.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정상의 기쁨을 만끽하며 행복한 순간을 사진으로 담았다.
내려갈 시간이다. 오를 때만큼이나 신중해야 한다. 하산은 충분히 준비하지 않고 쉽게 생각했다가 치명적인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하산은 늘 어렵고 위험하다.
정상에서 하강하기 위해서 100m 설벽 구간을 내려 가야 한다. 설벽이지만 따뜻한 날씨에 눈이 얼고 녹기를 반복해서 빙질이 강하다. 첫 40m는 안자일렌으로 하강했다. 나머지 60m는 피켈 두 개를 깊게 박아 확보하고 하강한 뒤 마지막 사람은 클라이밍 다운을 했다.
이틀 굶은 끝없는 하산
암릉 구간은 더 힘들다. 50~60도 경사의 너덜지대로 지그재그 여러 갈래로 길이 나있고 한 발 디딜 때마다 낙석이 떨어진다. 조심하지 않으면 미끄러지거나 낙석에 맞을 수 있다. 암릉 구간 끝에서 60m 로프로 하강해서 5~6명이 서있을 수 있는 테라스에 내려선 다음 10m 정도 다시 하강한다. 마지막 사람은 10m 직벽을 클라이밍 다운했다.
빙하지대에 내려서서 오른쪽 윔퍼 리지 쪽으로 크레바스를 피해 간다. 150m쯤 내려섰을 때 하강 포인트가 있었다. 50m 로프를 고정하고 사선으로 하강한 뒤 로프는 산에 기부했다. 다시 60m를 두 번 하강하고 암릉길을 따라 80m쯤 내려가자 벽 끝에 하강 포인트가 여럿 있다. 여기서 30m, 60m, 60m 하강해 플랑팡시우Planpincieux 빙하로 내려섰다. 시간은 밤 9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피곤했으나 빙하에서 비박은 위험할 수도 있어 일단 빙하를 벗어나기로 한다. 어둠이 드리울 때쯤 빙하를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 문제는 보칼레트산장Refuge Boccalatte을 찾는 것이다. 애타게 찾았지만 어두워 산장이 잘 보이질 않는다. 너덜지대 계곡을 따라 터벅터벅 쉬지 않고 내려왔건만 산장은 안 보이고 저 멀리 쿠르마요르Courmayeur 마을 불빛만 환하게 빛난다.
마을에 금방 도착할 것 같았지만 한 시간을 걸어도 진척이 없다. 결국 포기하고 하루 더 비박한다. 북벽에서 못다 헤아린 별을 남벽으로 내려와 술잔에 담아 밤새 헤아리다 잠들고 싶었으나, 결국 남벽 암벽 사이에 쪼그리고 누워 몇 개 헤아리지도 못한 채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위를 보니 보칼레트산장이 떡하니 절벽에 붙어 있다. 밤새 숨바꼭질 한 것 같은 기분이다. 어젯밤 위험해 보여 가지 않았던 곳 옆에 있다. 산장을 내려서면서 왼쪽 계곡을 건너니 능선으로 올라서는 예쁜 등산로가 보인다. 짐을 꾸려 서둘러 하산했다. 기쁜 마음에 발걸음이 가볍다. 이틀을 굶었는데 배가 고프지 않다. 입가에 미소가 가시지 않는다. 오늘 밤에는 예쁜 술잔에 샤모니의 별과 설산을 가득 담아서 밤 새워 웃고 마시며 잠들고 싶다.
월간산 10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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