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에 고언’ 박관용 · ‘여야 조율’ 임태희… ‘그림자’ 로 더 빛났다
■ 베스트 리더십 - 정권 2인자 전현 대통령 비서실장
김영삼 아들 소문 직보 박관용
“권력자는 늘 돌아보라” 쓴소리
국회서도 바짝 몸 낮춘 김기춘
“비서는 입은 있되 말이 없어야”
선글라스 끼고 현장 누빈 임종석
내향적 文대통령의 보완재 역할
“나는 백 라이트” 은둔형 김대기
비서실 물갈이로 존재감 드러내
윤석열 대통령이 김대기 비서실장을 만나 주문한 것은 ‘작지만 똑똑한 대통령실’이다. 부처 위에 군림하던 청와대가 아닌 부처 간 정책을 조율하는 대통령실을 원했던 그는 정치인이 아닌 정통 경제 관료 출신의 김 실장을 초대 비서실장으로 발탁했다.
정권의 ‘2인자’로 불리는 자리에서도 김 실장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자신을 ‘백 라이트(back light)’라고 부를 정도로 철저히 대통령 뒤를 지키면서 조직을 이끄는 조용한 리더십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조용한 것만은 아니다. 김 실장은 대통령 취임 100일을 전후해 고강도 인적 쇄신을 단행했다. 대선 전후 무보수로 일했던 비서관, 행정관 수십 명이 짐을 쌌다. 대선 공신들을 받아들여 400명대로 불어났던 대통령실 조직을 300명 초반대로 축소했다. 대통령이 부담 없이 국정을 이끌 수 있도록 악역도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역대 비서실장들의 사례를 보면 비서실장들이 조직을 이끄는 리더십과 대통령의 호흡에 따라 대통령의 업적이 부각되기도 하고, 흔들리기도 했다. 이들의 사례로 대통령비서실의 역할과 성패를 가늠해본다.
◇대통령에 민심, 고언을 전달한 박관용 = 김영삼 정부 초기 청와대를 이끌던 박관용 전 비서실장은 대통령의 심중을 상하지 않게 고언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꼽혔다. 박 전 실장은 1994년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아들 김현철 씨를 둘러싼 소문에 대해서도 직보했다고 한다. “김현철이 모든 것을 다 한다”는 소문이 돌 때였다. 그는 김 전 대통령에게 “대단히 어려운 보고를 하나 하겠다”면서 아들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전했다. 김 전 대통령은 아무 말 없이 그저 듣고만 있었다고 한다. 여권 관계자는 “박 전 실장은 대통령뿐만 아니라 당대 실세들에게도 ‘권력자는 스스로를 항상 돌아봐야 한다’고 고언해 온 ‘미스터 쓴소리’”라고 전했다. 김대중 청와대의 비서실장이었던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도 대통령을 향한 쓴소리 방법을 매번 고민했다. 한번은 ‘A4 용지’에 고언을 미리 써서 대통령 보고 때 “읽어보시라”며 놓고 나왔다고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쪽지를 읽자마자 “왜 이런 것을 줬느냐”고 화를 냈다가도, 다시 전화 걸어 “화내서 미안하다. 너라도 이런 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의 보완재, 호남 대통령에 경북 비서실장 = 한국 최초의 호남 출신 대통령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첫 비서실장으로 경북 울진 출신인 김중권 전 비서실장을 발탁했다. 호남 출신 대통령과 경상 지역 출신 비서실장의 조합은 당시 민감했던 지역감정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약 30년간 정치·경제·사회적 우위를 점해온 영남권의 ‘지역 차별’ ‘정치 보복’ 우려를 불식시키는 게 정권 최대의 숙제로 불릴 만큼 절실했다. 그래서 발탁한 김 전 비서실장은 ‘영남과의 화해’에 대한 가장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대통령과 성격이 전혀 다른 비서실장이 보완재 역할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문재인 전 대통령과 임종석 전 비서실장이 대표적이다. 전면에 나서는 일이 적었던 문 전 대통령과 달리, 임 전 실장은 ‘그림자 비서실장’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국정 최전선에 섰다. 남북공동선언 이행추진점검위원장을 맡아 현장 곳곳을 누볐다. 당시 임 전 실장이 선글라스를 끼고 남북공동유해발굴을 위한 지뢰제거 작업 현장에 나섰다가 “국방 통수권자 폼을 잡는다”는 야당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우식 전 비서실장도 ‘진보 대통령’과 ‘보수 비서실장’이라는 이례적인 조합을 이뤘다. 노 전 대통령은 보수 성향의 연세대 총장을 비서실장으로 영입해 “우리 사회의 갈등과 분쟁을 해소하도록 도와달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김 전 실장은 실제 전국경제인연합회, 대한상공회의소 등 경제계 인사들이나 보수 언론과도 접촉해 보수 진영의 민심을 들었다. 노 전 대통령은 김 전 실장에게 “정치는 내가 할 테니까 조직과 인사 관리 책임을 맡아달라”고 했다고 한다. 일종의 ‘관리형’ 비서실장의 역할을 주문한 것이다. 김 전 실장은 “청와대에는 대통령만 존재하지 파벌은 용납하지 못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보수·진보의 싸움판이 벌어졌는데 청와대부터 그런 싸움을 걷어내야 한다는 취지에서였다.
◇대통령 흔들리자 방패로 나선 박지원 = 역대 대통령들은 레임덕이 시작되는 정권 중반기에 접어들면 측근 인사를 비서실장에 기용해 국정 장악력을 높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임기 막바지인 2002년 최측근 인사인 박지원 당시 정책특보를 비서실장에 앉혔다. 야당 시절부터 김 전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해 ‘왕특보’ ‘소통령’으로 불리던 인물이었다. 박 전 실장은 대통령이 임기 말 국정과제에 집중할 때 궂은일을 맡아서 했다. 야당이 김홍일·홍업·홍걸 씨 등 대통령의 세 아들을 ‘3홍(弘)’이라 부르며 연일 비리 의혹을 제기할 때 방패막이 역할을 했다. 노무현 민주당 대선 후보와의 관계설정,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앙금 해소를 위해 부지런히 전·현직 권력자들의 자택 문턱을 넘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허태열 초대 비서실장을 기용했다가 5개월 만에 경질하고 권력 막후에 있었던 김기춘 전 비서실장을 기용했다. 그는 ‘비서는 입은 있되 말이 없어야 한다’면서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기자들의 전화를 받지 않고 만나지도 않았다. 국회에서도 철저히 몸을 낮췄다. 그는 국정감사에서 ‘기춘대원군’ 지적을 받고 “부덕의 소치라 생각하고, 낮고 겸허하게 일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러곤 대통령을 대신해 악역을 마다하지 않았다.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을 역임했던 김 전 실장은 청와대, 내각, 사정기관을 빠르게 장악했다. 결국 문화계 블랙리스트·화이트리스트 작성을 지시한 혐의로 기소돼 구속 수감됐다.
◇내부 소통에 능했던 임태희·야당과 소통했던 문재인 = 과거 청와대 근무 경험이 있는 한 대통령실 관계자는 내부 조직 관리와 소통에 가장 능했던 비서실장으로 임태희 전 실장을 꼽았다. 임 전 실장은 원만한 성품과 부드러운 말투로 청와대 직원들 사이에서 특히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수도권 출신이면서도 ‘명예 목포 시민증’을 받을 만큼 호남 지역 및 야당 인사들과도 소통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런 임 전 실장은 반대로 ‘문재인 비서실장’을 소통하기 편한 인물로 꼽기도 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MB의 인수인계 과정에서 “당시 문재인 전 대통령이 청와대 비서실장을 하셨는데 제가 연락을 드려서 ‘인사에 관한 건 아주 불가피한 경우도 사전에 협의해서 하고 가급적이면 새로 인사하는 것은 자제했으면 좋겠다’고 했다”며 “문 전 대통령께서 잘 협조를 해 줬다”고 했다.
문재인 청와대의 유영민 전 비서실장도 상대적으로 공감과 소통에 의지가 강했던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참모들에게도 “문재인 대통령의 불통 이미지를 불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유 전 실장은 정치권과 내각에서도 ‘스킨십에 능하다’는 평을 들었다. 다양한 의견을 듣기 위해 회의 참석자 수를 늘리고, 외부 의견을 적극적으로 듣는 회의체도 만들었다. 대통령의 국정 구상 시간을 늘리기 위해 대면 보고 축소를 지시했던 노영민 전 비서실장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김윤희 기자 wor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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