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도, 거름도 아니다…옥상 텃밭 시금치 쑥쑥 자란 이유는 '이것'

이정호 기자 2022. 10. 3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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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보스턴대의 한 건물 옥상에 설치된 통풍구 인근에서 시금치가 자라고 있다. 최근 보스턴대와 영국 케임브리지대 연구진은 통풍구에서 나오는 실내 공기에 사람이 내뱉은 다량의 이산화탄소가 섞여 있어 작물 성장을 촉진한다는 연구를 발표했다. 보스턴대 제공

2015년 개봉한 미국 영화 <마션>은 인공위성이나 로봇형 차량이 아닌 인간이 직접 화성에서 탐사를 하는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탐사대원들은 화성 표면에서 토양을 수집하는 등의 활동을 한다. 그러던 중 이들이 거주하는 기지로 강력한 모래 폭풍이 접근한다. 기지가 모래 폭풍의 힘을 견딜 수 없다고 본 탐사대원들은 로켓에 탑승해 화성 궤도를 돌고 있는 우주선으로 긴급히 이륙하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기지에서 탈출하는 과정에서 탐사대원 중 한 명인 마크 와트니(맷 데이먼)가 모래 폭풍에 떠밀려 조난을 당하고 만다. 혼자 화성에 남은 와트니는 살아남기 위해 묘수를 낸다. 화성의 흙을 기지 내부로 퍼온 뒤 감자 농사를 지어 식량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양분과 수분이 없는 화성 흙에 대원들이 남기고 간 배설물을 거름 삼아 뿌리고, 로켓 연료를 화학적으로 분해해 물을 줬다. ‘감자 풍년’을 통해 와트니는 화성에서 조난 561일만에 구조된다.

<마션>에서 와트니가 농사를 지을 수 있었던 동력은 거름과 물이었다. 그건 지구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최근 과학계에선 훨씬 간단한 방법으로 작물을 잘 자라게 하는 방법이 고안되고 있다.

주인공은 이산화탄소다. 방법은 간단하다. 건물 옥상에 설치된 환기용 통풍구 앞에 텃밭을 만들면 그만이다. 사람의 호흡 때문에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은 실내 공기를 집중적으로 쏘인 작물은 그렇지 않은 작물보다 중량이 최대 4배나 무거웠다. 훨씬 잘 자랐다는 뜻이다. 도시 농업을 촉진할 방법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통풍구 공기에 ‘다량 이산화탄소’
미국 보스턴대와 영국 케임브리지대 소속 과학자들이 주축을 이룬 공동 연구진은 건물 옥상의 통풍구 앞에서 작물을 키우면 성장을 촉진할 수 있다는 분석 결과를 지난주 국제학술지 ‘프론티어스 인 서스테이너블 푸드 시스템즈’에 공개했다.

2017년부터 이 연구를 진행한 연구진은 도시에 있는 건물 옥상에 설치된 통풍구에서 나오는 실내 공기의 조성이 실외 공기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점에 주목했다.

사람들이 머무는 실내 공기는 호흡 때문에 실외 공기에 비해 이산화탄소 양이 많다. 실외 공기 중 이산화탄소 수치는 일반적으로 약 400ppm인데, 연구진이 보스턴대의 한 건물 옥상 통풍구에서 측정한 실내 공기 속 이산화탄소는 평균 830ppm이었다. 두 배가 넘는 수치다. 한국에선 다중이용시설의 실내 공기 중 이산화탄소 기준을 1000ppm으로 정한다. 연구진 실험에서 측정된 실내 공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비교적 흔한 수준이다.

연구진은 이산화탄소가 사람에게는 졸음을 유발하지만, 식물에게는 ‘보약’이 된다는 점에 착안했다. 식물은 햇빛, 물, 그리고 이산화탄소를 이용해 광합성을 한다. 광합성이 원활할수록 식물은 잘 자란다.

연구진은 보스턴대의 한 건물 옥상 통풍구 앞에 텃밭을 만든 뒤 시금치와 옥수수를 심어 이산화탄소의 ‘위력’을 알아봤다. 텃밭에 통풍구에서 배출되는 실내 공기가 정확히 쏟아지도록 굵은 파이프를 설치해 이산화탄소가 집중적으로 공급되도록 했다.

■‘헤비급’ 시금치로 쑥쑥 성장
결과는 놀라웠다. 연구 기간 통풍구 앞에서 자란 시금치는 통풍구에서 먼 자리에서 자란 시금치보다 평균 4배나 무거웠다. 옥수수도 2~3배 더 무거운 중량이 측정됐다. 이산화탄소를 먹은 작물이 그렇지 않은 작물에 비해 쑥쑥 자랐다는 뜻이다. 없는 이산화탄소를 일부러 발생시킨 게 아니라 이왕 대기 중으로 내보내는 이산화탄소의 배출 방향만을 바꿔서 ‘풍작’을 이룬 것이다.

연구진은 이번 기술이 도시 농업의 생산성을 높일 것으로 기대했다. 현재도 건물 옥상에서 작물을 키우는 일은 흔하지만, 별 다른 노력 없이 작물을 훨씬 잘 자라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먹기 위한 작물이 아니어도 이번 연구는 의미가 있다. 옥상에 나무를 심으면 건물 내부의 온도를 줄이는 효과가 생긴다. 냉방용으로 소모되는 전기를 절약하고, 도시 열섬을 완화할 수 있다. 통풍구를 이용해 나무를 잘 자라게 하는 손쉬운 방법이 생긴 것이다. 연구진은 논문에서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창의적인 방안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정호 기자 r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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