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C 사태와 ‘EQ’ 없는 기업[안치용의 까칠한 ESG 이야기](6)
2022. 10. 31. 07:04
며칠 전 전북교육청이 연 학교장 연수 프로그램에 강사로 다녀왔다. 연수 주제를 요약하면 ‘ESG와 교육’이다. 전라북도 초·중·고 교장들이 대거 참석해 높은 관심을 보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DeSeCo(Defining and Selecting Key Competencies) 프로젝트는 지식보다 역량에 중점을 둔 교육을 표방한다. 지식의 전달과 습득에 머물지 않고 가치, 행동, 삶의 방식 변화를 일으키는 교육이 돼야 하며 학생 행위주체성(student agency)을 일깨워야 한다는 교육의 관점은 입시 위주의 국내 교육에 적용할 수 있는지 여부를 떠나 ESG교육에서도 관철돼야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DeSeCo(Defining and Selecting Key Competencies) 프로젝트는 지식보다 역량에 중점을 둔 교육을 표방한다. 지식의 전달과 습득에 머물지 않고 가치, 행동, 삶의 방식 변화를 일으키는 교육이 돼야 하며 학생 행위주체성(student agency)을 일깨워야 한다는 교육의 관점은 입시 위주의 국내 교육에 적용할 수 있는지 여부를 떠나 ESG교육에서도 관철돼야 한다.
CSR은 ESG경영의 핵심
‘지식보다 역량’은 기업에서 더 현실적이고 더 구체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는 SPC 사태를 보면서 역량의 중요성을 새삼 더 느끼게 된다. 또한 핵심 역량을 제대로 정의하고 선택하되 그것이 가치, 행동, 삶의 방식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는 원론이 얼마나 사활적인지 SPC의 행태를 보며 절감한다. 노동자의 사망 사고 자체가 가장 문제이지만, 특별히 유족에게 장례용품으로 파리바게뜨 빵을 전달한 것을 포함한 SPC의 전반적 대응은 가치 부재의 성과 몰입 경영이 위기 국면에서 얼마나 취약해질 수 있는지를 입증한 생생한 사례였다. 경영학 교과서에 반면교사의 사례로 올라갈 가능성이 크다.
SPC 사태에서, 바람직한 인간형을 거론할 때 흔히 IQ보다 EQ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기업으로 치면 ‘IQ+EQ’가 이른바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된다. 사람은 IQ가 아주 낮다고 해도 EQ가 높은 것만으로 때로 존중받는 삶을 꾸려갈 수 있지만, 기업이라면 ‘IQ’와 ‘EQ’를 모두 높여야 생존할 뿐만 아니라 성장할 수 있다.
여러 대학에서 책임경영이란 과목을 가르쳤다. 학기 초반에 학생들에게 “기업이 무엇이냐” 물으면 전공이나 학년과 무관하게 한결같이 “이윤을 추구하는 조직”이라고 대답한다.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는 사회적 기관이라고 정정하며 학기를 시작했다가 그 말로 학기를 끝내곤 했다. ‘사회적’이란 한 단어가 말하자면 기업의 ‘EQ’인 셈이다.
교육계를 비롯해 사회 여러 분야에서 ESG에 새롭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ESG경영을 선포하고 관련 위원회를 만드는 등 기업이 가장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지만, 사실 그 흐름의 중심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기업이야말로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미 오래된 논의인 CSR을 제대로 이행했다면 굳이 ESG경영입네 뭐네 하며 새롭게 무언가를 하는 척할 이유가 없다.
경영학에서 CSR에 관한 논의가 미국의 경제학자인 하워드 보웬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데 의견이 대체로 일치한다. 보웬은 저서 〈기업인의 사회적 책임(Social Responsibilities of the Businessman〉(1953)에서 “기업인은 사회의 목표와 가치에 비추어 바람직한 방향으로, (기업의) 정책을 추진하고 의사결정하고 행동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아닌 기업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지만, 기업인의 책임은 불가피하게 기업의 책임으로 옮아가며 CSR 담론을 활성화한다.
물론 보웬 이전에도 CSR에 관한 논의는 존재했다. 짧게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시점으로 올라간다.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학장 도널드 K. 데이비드는 “미래의 비즈니스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어깨에 깃들게 될 책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발언이 소비에트 공산주의에 맞서 자유시장 경제를 옹호하는 관점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의의가 없지는 않다.
기업이란 조직이 어떤 사회적 책임을 지녀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기업의 본질과 관련되기에 CSR 논의는 길게는 기업의 탄생 시점부터 존재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국부론〉(1776)에 등장한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후대의 상상력이 계속 덧칠해지면서 경제 주체의 개별적인 사익추구가 사회 전체로서 공익을 구현하게 된다는 시장중심주의 세계관을 대표하게 된다. CSR에 대한 스미스의 견해는 당시가 CSR이란 개념 자체가 없던 시기임을 감안해 해석하면, 기업의 책임을 경제적 책임에 국한했다고 볼 수 있다. 앞의 이야기를 차용하면 ‘EQ’ 없이 ‘IQ’만을 강조했다고 하겠다.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써라?
CSR과 관련해 그 시대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은 감리교 창시자인 목사 존 웨슬리다. 웨슬리는 〈국부론〉 발간보다 살짝 이른 시점에 ‘돈의 사용법’(1760)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면서 사회책임투자(SRI)뿐 아니라 CSR의 원형 비슷한 것을 제시했다. “생명이나 건강 혹은 정신을 해치는 방법을 통해 돈을 얻어서는 안 된다. (…) 사악한 거래 행위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 (…) 또한 이웃의 재산이나, 이웃의 신체, 그들의 영혼을 해쳐서도 안 된다”고 강조해 SRI, 나아가 ESG의 최초 발언자로 인용된다.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의 ‘신탁윤리(trusteeship)’는 종교에 입각해 기업가의 사회책임을 주창한다. 그는 ‘부의 복음’(1889)이란 짧은 글에서 “부자는 단지 신으로부터 재산에 대한 관리 책임만을 맡았고 (…) 돈을 사회를 개선하고 세계 평화를 증진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부자를 신탁인(trustee)이자 대리인(agent)으로 파악했다.
카네기의 논리는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쓴다’는 속담을 연상시킨다. 자본주의와 개신교 복음주의가 기형적으로 결합한 결과물이 아마 카네기의 가치관이지 싶다. 카네기에겐 ‘IQ’와 ‘EQ’가 구분돼 순차적으로 나타난 듯하다. 또한 미국에서 왜 (유럽보다 더) CSR이 학문적으로나 사회적 담론으로 번성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EQ’를 서둘러 보완하려는 노력이 미국 경영학에서 CSR의 역할이라고 말해도 되겠다.
CSR과 ESG경영은 학생 행위주체성과 마찬가지로 자발성에 근거한 변혁적 행위를 요구한다. 꼭 사회를 위해 그렇게 하라는 게 아니다. 기업 자신을 위해서도 자발성에 근거한 변혁적 행위가 불가결하다.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겠다는 태도는 카네기 시대엔 어쨌든 통용됐다. 지금은 아니다. 파타고니아처럼 정승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는 기업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ESG경영이 기업에 정승같이 벌라고 요청하지는 않는다. 최소한 개같이 벌지는 말아야 한다고 요청한다. 가장 ESG경영에 반하는 행위는 개같이 벌면서 정승같이 버는 양 사회를 속이는 일이지 않을까. SPC가 지속가능한 미래를 언급하면서 “ESG경영으로 세상을 밝힙니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한 것을 여기서 저절로 상기하게 되는 건 그들의 업보다.
안치용 ESG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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