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만점 가을길] 왕의 무덤, 시간여행 문이 열리다

서지민 2022. 10. 31. 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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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구리 동구릉
7인의 왕과 10인의 왕비 잠든 왕릉군
450년간 조성…건축 발전사 한눈에
“내 무덤에 내 고향땅 억새 심어다오”
태조 이성계 묻힌 건원릉 봉분 ‘눈길’
붉은 단풍나무 사이로 솔 향기 ‘솔솔’
속세 떠난 듯 절로 사색에 빠져들어
 

경기 구리 동구릉의 대표 왕릉 건원릉 정자각. 1408년(태종8년) 태조 이성계 제사를 위해 세워졌다. 2011년 보물로 지정돼 매년 건원릉 친향(親享)기신제(忌晨祭) 재현 행사가 이곳에서 열린다.


이맘때 조선왕릉을 찾으면 알록달록 단풍이 물들어 가을 정취를 만끽하기 좋다. 왕릉 주인이 잠들어 있는 봉분은 청명한 하늘과 맞닿아 우아한 곡선을 만들어내고, 제향을 지내는 건물인 정자각은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바스락바스락 발을 내디딜 때마다 들리는 낙엽 밟히는 소리에 귀기울이다 보면 깊은 사색과 함께 날아갈 듯이 편안한 느낌에 빠져든다. 가을 풍경을 눈과 귀에 담아보고자 경기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을 찾았다.

◆9기 능 모인 조선 최대 왕릉군=버스 정류장 이름이 ‘우리나라 최대 왕릉군인 동구릉’이라 표시된 곳에서 내려 5분 정도 걸으면 동구릉 입구에 도착한다. 초입부터 노랗고 빨갛게 물든 오리나무·상수리나무·팥배나무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이곳은 450여년에 걸쳐 9기의 능이 조성된 곳이다. 약 197만㎡(59만6000평) 규모에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가 잠들어 있다.

류경미 동구릉 역사문화관 해설사는 “조선시대 때 만들어진 왕릉군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곳”이라며 “오랜 세월동안 차츰 변화해 온 건축 기술과 시간이 갈수록 섬세해진 석조 모형을 알아보는 재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입구에서부터 2∼3분만 천천히 걸어 들어가면 동구릉 대문 역할을 하는 홍살문이 나온다. 홍살문은 궁전·관아·능·묘 등 중요한 곳 앞에 세우는 나무문이다. 한자 문(門) 형태를 본뜬 모양으로 문짝도 없이 나무 기둥만 하늘 높이 삼엄하게 치솟아 있다. 양옆에 우뚝 서 있는 붉은색 나무 기둥과 이를 이어주는 화살 모양 나무 장식은 예로부터 나쁜 기운과 악귀를 막아준다고 여겨졌다.

동구릉 방문객들이 건원릉 숲길을 거닐며 가을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홍살문을 지나 숲길 따라 더 깊숙이 들어선다. 마치 꽃잎이 흩날리듯 단풍잎이 바람을 타고 천천히 땅으로 떨어진다. 단풍나무 사이사이로 잣나무와 소나무도 보인다. 류 해설사는 “소나무는 향이 강해 벌레가 모여들지 않는다고 해 예로부터 왕릉 주변에 많이 심었다”며 “숨을 크게 들이쉬면 은은한 소나무 향기가 나서 산책하기 좋다”고 귀띔했다.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건물은 ‘재실’이다. 제사에 필요한 도구나 음식을 저장·관리하던 곳이다. 재실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왕릉이 모습을 드러낸다.

중앙에 ‘건원릉’이 있고 왼쪽으로 5기, 오른쪽으로 3기가 있는 구조다. 입구에서 시작해 왼쪽으로 크게 돌면 ‘수릉(문조)’ ‘현릉(문종)’ ‘목릉(선조)’ ‘건원릉(태조)’ ‘휘릉(장렬왕후)’ ‘원릉(영조)’ ‘경릉(헌종)’ ‘숭릉(현종)’ ‘혜릉(단의왕후)’을 차례로 보게 된다. 이곳저곳 감상하며 천천히 걷다 보면 모두 둘러보는 데 2시간 정도 걸린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묻혀 있는 건원릉 봉분은 다른 곳과 달리 잔디가 아닌 억새로 덮여 있다. 태조의 유언에 따라 아들인 태종이 고향 함흥에서 직접 흙과 억새를 공수해왔단 일화가 전해진다.


◆태조 이성계 잠들어 있는 ‘건원릉’=동구릉에서 제일 먼저 자리를 잡은 것은 건원릉으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능이다. 가까워질수록 어디선가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들린다. 입구 바로 앞에 시냇물이 흐르고 있어서다. 이 물줄기는 능이 있는 곳과 속세를 구분하는 경계선 역할을 한다. 류 해설사는 “물길을 가로지르는 돌다리인 ‘금천교’를 지날 때면 마음을 경건히 하고 건너야 한다”고 일러줬다.

금천교를 건너자마자 길이 두개로 나뉜다. ‘향로’와 ‘어로’다. 향로란 제사를 지낼 때 향과 축문(신에게 보내는 편지)을 들고 들어서는 길이기 때문에 함부로 밟아선 안된다. 옛말엔 “향로를 밟으면 도깨비가 잡아간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장난치면서 신성한 향로를 함부로 밟는 어린아이에게 겁을 주려 만든 말이다.

이곳에선 왕이 걷는 길인 어로보다도 향로가 더 중앙에 있다. 선왕을 모시러 온 곳이기 때문에 왕도 예를 갖춰서 입장한다.

관람객도 향로 대신 어로로 걸어야 한다. 어로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면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이 보인다. 정자각 너머로 억새로 뒤덮인 건원릉 봉분이 눈에 들어온다. 모든 조선왕릉은 봉분이 잔디로 덮여 있는데, 이곳만 유일하게 억새가 빼곡히 나 있어 가을에 유독 인기가 많다. 태조가 유언으로 자신의 고향인 함흥에서 억새를 가져다 심어달라고 부탁해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는 억새가 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 어우러져 운치 있다.

류 해설사는 “우리 선조들은 정자각에서 향을 태우면 뒤쪽에 있는 봉분에서 왕의 혼이 깨어나 연기를 따라온다고 믿었다”며 “이렇게 불려 나온 혼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왕릉 둘러봤으니 ‘수라상’ 맛볼까=경건한 마음으로 왕릉을 둘러보며 가을 분위기를 충분히 감상했다면 이젠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자.

동구릉 바로 앞에는 ‘동구릉갈비’라는 맛집이 있다. 점심메뉴로 떡갈비와 된장찌개가 있다. 뜨거운 철판에 큼지막한 떡갈비가 올라가 있다. 큰 힘을 주지 않아도 숟가락으로 쉽게 잘릴 정도로 부드럽다. 떡갈비 한 조각을 한입 가득 넣고 씹어본다. 풍부한 육즙이 흘러나오고 끝엔 마늘향이 입안 가득 퍼진다. 마치 조선시대 왕이 돼 호사를 누리는 것처럼 배부른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다. 가격은 1인 1만2000원.

구리=서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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