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전채에 채권시장 ‘교란’…‘30조 적자’ 해법은 요금 인상뿐?
다른 쪽선 “전기요금 인상해야”
지난 13일은 전력업계에 기록할 만한 날이었다. 전력거래소에서 집계한 하루 평균 전력도매가격(SMP·계통한계가격)이 킬로와트시(㎾h)당 270.24원으로 사상 최고치를 경신한 날이다. 전력도매가격은 한국전력공사가 발전회사들로부터 전력을 구매할 때 적용되는 가격이다. 사오는 값은 비싸졌는데, 파는 가격(전력판매단가·올 상반기 평균 ㎾h당 110.4원)은 그대로인 탓에, 한전은 전기를 팔 때마다 손실이 쌓이고 있다. 한전은 마음대로 가격을 올릴 수 없으니, 올 들어서만 20조원이 넘는 공사채(한전채)를 발행하는 등 빚으로 버텨왔다. 이런 가운데 최근 자금 조달시장이 경색되면서 신용도 높은 한전채로 시중 자금이 쏠리는 ‘한전채 블랙홀’ 논란마저 불거졌다. 더는 한전의 적자가 한전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한전채로 버티지만 ‘물량교란’ 우려
에너지업계에서는 전력도매가격이 연말에는 킬로와트시당 300원까지 오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뒤 국제유가와 액화천연가스(LNG) 가격이 급등하고 있어서다. 전력도매가격은 지난해 상반기에는 킬로와트시당 80원 안팎이었지만, 올 9월 평균 킬로와트시당 234.75원까지 올랐다. 한전의 올 상반기 전력구입비는 33조7천억원으로, 지난해 상반기 17조2천억원에서 95.9%나 늘었다. 통상 전력구입비 총액이 한전 영업비용의 80∼85%를 차지한다. 정부와 시장에서는 올 한전의 적자 규모가 30조원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한전이 부족한 운영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대량 발행한 한전채는 자금 조달 시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올 1∼9월 한전채 순발행액은 18조3천억원에 이른다. 지난해 같은 기간 2조7천억원에 견줘 크게 뛴 것으로, 올 1∼9월 전체 신용채권의 36.7%나 된다. 강도 높은 통화 긴축과 경기 둔화로 채권을 사려는 수요가 이미 위축되고 있는데, 얼마 안되는 수요마저 한전채가 휩쓸어가고 있다. 일반 기업들의 자금 조달이 어려워진 주요 원인 중 하나로 한전채가 지목받는 배경이다.
앞으로 한국은행의 추가 기준금리 인상과 글로벌 경기 부진으로 채권시장 수요는 더 얼어붙을 가능성이 높다. 자칫 한전채 등 초우량채의 대규모 발행이 더 낮은 신용등급의 회사채 거래량을 감소시키고 이는 다시 해당 회사채에 대한 수요 위축으로 이어지는 악순환도 나타날 수 있다. 거래량이 감소하면 해당 회사채의 현금화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투자자 입장에서는 거래량 감소만으로도 해당 회사채를 더욱 기피하게 된다. 한은이 지난 27일 적격담보증권 등의 범위에 한전채를 추가하며 대책 마련에 나선 배경이다.
한전채 물량이 너무 많다 보니 시장의 소화 능력도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AAA등급 특수채와 국고채 3년물 간 스프레드(금리 격차)는 지난 27일 1.02%포인트를 기록하며, 올해 초보다 0.75%포인트 뛰었다. 코로나19 초기인 2020년 3∼4월 당시에도 최대 0.30%포인트였던 스프레드가 이례적인 수준으로 벌어졌다. 그만큼 훨씬 비싼 이자를 줘야 자금 조달이 가능해진 한전 입장에서는 여건이 나빠지고 있다는 뜻이다. 금융당국 한 관계자는 “올해 들어 급증한 한전채 발행량을 시장도 감당하지 못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한전은 다른 조금조달 방안이 마련되지 않는 한, 한전채를 계속 발행할 수밖에 없다. 현행 전력시장운영규칙을 보면, 발전사들에 전력거래대금을 지급해야 하는 날은 3∼10일 단위로 숨가쁘게 돌아온다. 한전이 정해진 날에 대금을 지급하지 못하면 채무불이행으로 간주되고, 이튿날부터 전력 거래가 정지된다. 지난 2001년 한전에서 발전부문 6개 자회사가 분할된 뒤 한전이 납기일을 맞추지 못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최근 한전채 발행량이 법정 한도에 가까워지고, 6%에 가까운 고금리에도 유찰되는 일까지 생기며, 한전 내부의 위기감은 어느 때보다 고조된 상황이다. 한전 관계자는 “지금 추세대로면 내년 3월 2022년 결산 때는 발행액이 법정 한도를 초과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전채 발행 한도는 한전의 자본금과 적립금의 최대 2배다. 정부와 한전은 발행 한도를 5배로 상향 조정하는 방향으로 법 개정을 추진 중이다. 발행 한도가 늘면 한전은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지만, 시장 자금이 한전채로 쏠리는 문제는 심화될 수밖에 없다.
고물가 탓 요금 인상 번번이 제동
한전 입장에서 정공법은 결국 전기요금 인상이다. 하지만 물가상승 우려에 번번이 제동이 걸리고 있다. 지난해 도입한 연료비 연동제(전기 생산에 들어간 연료비 변동분을 3개월 단위로 전기요금에 반영)는 지금까지 총 7번 조정할 기회가 있었지만, 4차례나 동결됐다. 가장 최근 요금 조정 때인 지난달 말, 어렵사리 킬로와트시당 7.4원 인상을 발표했지만, 이때 인상으로 인한 연말 적자 개선 효과는 1조원에 미치지 못한다.
지난 2018~2021년 한전 사장이었던 김종갑 한양대 특훈교수는 지난 6월 언론 인터뷰에서 “정부가 가격을 통제하면 일시적으로 소비자 부담이 줄지만, 장기적으로는 한전 경영 구조가 왜곡돼 부담이 커지고, 시장에 가격 신호가 제대로 보내지지 않아 전력 낭비는 계속된다”고 지적했다. 2020년 기준 한국의 가정용 전기요금은 메가와트시(MWh)당 103.9달러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중 네 번째로 저렴하다.
정부는 물가 상승 부담에 요금 인상을 미루는 대신, 난방용 가스·전기 수요 증가로 전력도매가격이 높아지는 올 12월부터 내년 2월까지 전력도매가격 상한제(전력도매가격 상한을 10년 평균의 125%로 규정)를 한시 도입할지 검토하고 있다. 발전사들의 수익을 인위적으로 낮춰 한전의 부담을 줄이는 방안인데, 민간 발전사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아 실제 도입 여부는 지켜봐야 한다.
시장에서는 정부가 ‘최후의 카드’로 재정을 투입할 가능성이 꾸준히 거론된다. 지난 2008년에는 고유가·고환율로 한전이 2조7980억원의 영업손실을 내자, 정부는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해 6680억원을 한전에 투입한 바 있다. 하지만 ‘건전재정’을 앞세우는 정부가 부정적인 태도인 것은 물론, 한전도 가능성과 실효성 양쪽에서 모두 회의적인 분위기다. 한전 관계자는 “올해 적자 예상 규모가 30조원이라, 재정 지원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요금 정상화와 자체 구조조정 말고는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더욱이 재정 투입을 위한 추경 편성과 국회 통과에는 짧지 않은 시일이 걸릴 수 있어, 당장 눈앞에 닥친 문제들을 신속히 풀 수 있는 대안도 아니다.
3개월마다 돌아오는 전기요금 조정 기회를 놓치지 말고, 요금 인상으로 생계비 부담이 가중될 취약계층에 대한 재정 지원을 강화하는 것이 그나마 실현 가능한 대안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현재 대표적으로 저소득층에 냉·난방 연료비를 지원하는 에너지바우처 지급 대상은 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 가구 전체가 아니다. 가구원에 노인, 영유아, 장애인, 임산부 등이 있어야 수급 대상이 된다. 지난해 대상 가구는 83만2014가구였고, 지급단가는 연 12만7천원에서 지난 12일부터 연 18만5천원으로 올랐다. 국회 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지난해 에너지바우처 예산 1046억원 가운데 305억원은 제도 홍보 부족 등의 이유로 사용되지 않았다.
최하얀 기자 chy@hani.co.kr 이재연 기자 ja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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