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시론] 다양성이야말로 건강한 균형
유학 시절 기숙사에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있었다. 전공도 다르고 출신 학교도 달랐지만 말이 잘 통해서 몇년을 어울려 지냈다. 전공이 달라서 오히려 서로 잘 모르는 분야의 지식과 통찰을 주고받을 수 있었던 덕인지 우리는 별다른 갈등 없이 잘 지낼 수 있었다. 그렇다고 사람이 완벽하기만 하겠는가. 외교사 전공의 그 친구는 사료를 다루는 사람답게 아주 신중하고 꼼꼼한 나머지 정도가 지나쳐서 나처럼 예술가적 직관에 따라 움직이기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편집증 환자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이 친구의 신중함을 지나친 갑갑함에 관한 일화가 많은데 한 가지만 들어보겠다.
1990년대에 논문을 써본 사람은 기억할 것이다. PC에서 작업한 것을 3.5인치 디스켓에 담아 따로 보관하고 옮기던 일을. 디지털 시대의 초입이었다. 종이에 손으로 쓰던 아날로그 시기에는 그 종이의 보관이 골칫거리였다. 원고를 통째로 잃어버리기도 하고, 또 쉽게 훼손이 되거나 섞이기도 해서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원고를 잃어버려 절망한 나머지 학위를 포기하고 돌아간 사람까지 있었다. 그런 점에서 1980년대부터 대중적으로 쓰기 시작한 컴퓨터는 혁명이었다. 편집하고 수정하며 보관하는 일이 PC에서 동시에 이뤄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컴퓨터에 이상이 생기면 마치 종이 원고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재앙을 마주한다는 점이었다. 요즘과 비교하면 하드웨어도 소프트웨어도 모두 불안정한 시대였다. 논문이 목숨 다음으로 소중한 유학생들로선 어떻게든 그때까지 작성한 논문을 탈 없이 보전하는 게 과제였다.
위의 친구는 이 문제에 대해 거의 편집증적 강박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디스켓을 2개 만들어 하나는 자신이 보관하고, 다른 하나는 나에게 보관을 부탁하곤 했다. 자신의 PC에 저장된 것까지 하면 모두 3개의 논문 파일을 만들어 따로 보관하는 것이었다. 만에 하나 어디서 말썽이 나더라도 대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 친구는 내게 새 버전의 디스켓을 여러 번 바꿔가며 맡겼고, 마침내 뛰어난 논문을 완성해 학위를 얻은 뒤, 지금은 해당 분야의 존경받는 학자로 활동하고 있다.
오래 전 일이 갑자기 떠오른 것은 최근 벌어졌던 앱과 포털의 먹통 사태 때문이다. 스마트폰은 이제 우리들 일상의 가장 중요한 우주가 되었다. 사기업으로서 최대한 이용자들을 끌어들여 수익을 창출하는 일을 비난할 수는 없다. 문제는 통신의 공공성이다. 카카오 같은 시장 지배적 앱이 자신의 기능을 못하는 순간, 우리의 일상이 온통 단절되기 때문이다. 숨은 쉬어야 하고, 피는 돌아야 하듯, 통신과 정보 또한 막힘없이 흘러야 한다. 뇌경색과 심근경색이 그러하듯 통신경색 또한 얼마든지 우리를 쓰러트릴 수 있는 디지털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이미 국가기간통신망의 한 부분이 되어버린 공룡 앱과 포털 사이트가 비용 절감과 수익 창출 같은 사기업의 논리로만 움직이도록 내버려둘 수 없는 이유가 그것이다. 비용을 들여서라도 만일의 위험에 대비하는 분산 시스템을 잘 갖추었다면 주말의 먹통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사는 지나친 집중의 단일화가 가져온 인류의 비극을 기억하고 있다. 인종주의의 나치즘과 전체주의의 옛소련 같은 정치에서부터, 단일품종의 감자에 병이 돌아 나라가 망하다시피 했던 아일랜드의 기근과 노키아라는 공룡통신기업의 몰락으로 나라가 휘청였던 핀란드 같은 경제 문제 등등, 지나친 집중의 단일화는 그만큼 더 많은 위험을 안고 있다. 그러니 집중될수록 위험을 분산하고, 획일화를 피해 다양함으로 균형을 잡는 신중한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당장 생명체의 다양함이야말로 생태계의 건강함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닌가?
디지털 혁명은 우리 삶에 엄청난 선물을 가져왔지만 역으로 집중을 가속화함으로써 주말의 먹통 사태 같은 위험과 혼란을 초래하기도 한다. 그 위험을 피해 어떻게 안전하고 건강하며 다양한 일상의 생태계를 만들어갈 것인가? 그 물음을 던져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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