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215> 진주사마소에 대한 이야기

조해훈 고전인문학자 2022. 10. 3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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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이르러 과연 목사(牧使)를 제수받았다.

진주사마소는 정돈(鄭墩) 등이 1736년 주창하여 다시 창립하고 이에 따른 명부인 사마안(司馬案)도 만들었다.

진주사마소는 사마들이 문과에 합격하기 위해 공부를 하던 공간이기도 했다.

서부 경남에서는 진주 이외에 함양과 합천 삼가에서 1730년대에 사마소가 중건되고, 의령은 1805년에 중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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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향소·사마소가 많이 점한 토지와 노비를 뺏어(削鄕社司馬所媵占田奴·삭향사사마소잉점전노)

이에 이르러 과연 목사(牧使)를 제수받았다. 이미 진주에 이르자 먼저 민간에 있는 폐단을 찾아 한 가지로 고쳐 혁파하였다. … 또 유향소와 사마소가 많이 점하고 있던 토지와 노비를 뺏어 서원에 귀속시켰다.

至是果拜牧使. 旣下車, 首訪弊之在民者, 一釐革之. … 削鄕社司馬所媵占田奴, 歸之書院.(지시과배목사. 기하차, 수방폐지재민자, 일리혁지. … 삭향사사마소잉점전노, 귀지서원.)

위 문장은 1578년께 진주목사로 부임한 이제신(李濟臣·1536~1584)의 신도비명(神道碑銘) 내용 일부로, 그의 문집인 ‘청강집(淸江集)’에 수록돼 있다. 이제신이 진주목사로 부임해 이 고을의 여러 폐단을 제거하였다. 그중 하나가 유향소와 사마소가 점취하고 있던 토지·노비를 빼앗아 서원에 귀속시켰다는 내용이다.

진주에서는 조선 초기부터 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그러다 보니 유향소와 사마소의 입김이 강해서 수령도 통제를 가하지 못할 정도였다. 사마소는 생원과 진사에 합격한 사람만 출입할 수 있는 특수 공간이었다. 하지만 ‘인조실록’ 권 14에서도 볼 수 있듯 사마소가 노비를 두고, 재산을 불리며, 향리 여론을 주도하고, 관법(官法)을 침해하여 동요시키는 등 폐단이 많아 혁파해야 한다는 주장이 종종 있었다. 임진왜란 때 전국의 사마소가 많이 소실됐다. 진주사마소는 정돈(鄭墩) 등이 1736년 주창하여 다시 창립하고 이에 따른 명부인 사마안(司馬案)도 만들었다. 진주 사마안은 이후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 진주사마소는 사마들이 문과에 합격하기 위해 공부를 하던 공간이기도 했다.

필자는 1905년 4월에 목활자본으로 간행된 진주 사마안인 ‘진양연주안(晉陽蓮柱案)’을 훑어보고 있다. 서부 경남에서는 진주 이외에 함양과 합천 삼가에서 1730년대에 사마소가 중건되고, 의령은 1805년에 중건되었다. 거창에서는 김천일(金千鎰)이 1684년 사마안을 새로 작성하였는데 그 이전에도 이미 사마안이 있었으며, 사마소도 기능하고 있었다고 한다. 진주사마소 건물이 지금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경주에는 경주향교 인근에 사마소가 있어 필자가 가끔 들르며, 이와 관련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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