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한의 토포필리아] 금단의 땅에서 도시의 여백으로

한겨레 2022. 10. 30. 18:4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배정한의 토포필리아]

높은 장벽에 갇혀 오랜 세월 잊혔던 금단의 땅, 송현동이 열렸다. 사진 주신하

배정한 |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금단의 땅이 열렸다. 높은 장벽에 갇혀 오랜 세월 잊혔던 미지의 땅, 송현동 공터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경복궁 옆 동네, 안국역 사거리에 맞붙은 송현동 부지의 면적은 3만7117㎡(약 1만2천평), 서울광장의 세배다. ‘열린송현녹지광장’이라는 이름을 달고 임시개방된 공터의 드넓은 잔디밭과 거친 야생화가 길 가던 시민들을 멈추게 한다. 미술관 나들이 나섰다가, 북촌에서 데이트를 즐기다가, 광화문 쪽으로 율곡로를 걷다가, 그저 안국역으로 바삐 움직이다가 낯선 공터를 보고 저절로 걸음을 옮기게 된다. 생경한 풍경에 놀란 시민들의 감탄이 곳곳에서 터진다. 헐, 여기 뭐지? 서울 도심에 이렇게 뻥 뚫린 데가 있었어? 텅 빈 이대로 아무것도 짓지 말고 그냥 두면 좋겠어.

서울이 달라 보인다. 시원하고 여유롭다. 도심 한복판에서 가장 넓은 면적의 하늘을 볼 수 있는 곳일지도 모르겠다. 유려한 인왕산과 장엄한 북악산 산세가 파노라마로 펼쳐지며 도시를 향해 달려든다. 등을 돌리면, 번잡하고 어수선한 율곡로 남쪽 고층건물들마저 아름다워 보인다.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보는 낭만적인 도시 스카이라인 못지않다. 줄지어 걷는 인파로 북적거리는데도 텅 빈 들판에 홀로 선 느낌. 돈으로 살 수 없는 경관의 가치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유려한 인왕산과 장엄한 북악산이 파노라마로 펼쳐지며 도시를 향해 달려든다. 사진 배정한

미지의 땅이었다. 높은 돌담 너머에 무엇이 있었을까. 경복궁 동쪽 일대는 본래 송현(松峴, 솔재)이라는 이름처럼 소나무가 많은 왕실 소유 언덕이었다. 임진왜란 무렵 부마와 외척들 거주 공간으로 변모했고, 조선 말기에 이르면 권문세가 집들이 들어선다. 1910년대에는 친일파 윤덕영 일가가 송현동 땅 대부분을 소유했다. 이후 조선식산은행 차지가 돼 직원 숙소로 쓰였다. 해방 뒤 미국 정부가 이 땅을 양도받아 주한 미국대사관 직원 숙소가 들어섰고 폐쇄적인 돌담이 둘러쳐졌다. 송현동이 서울의 지도에서 사라진 이유다.

미국 정부는 1997년 대사관 숙소 이전을 결정했고, 삼성생명이 2000년 1400억원을 들여 매입한다. 이때부터 송현동은 방치됐다. 주변 고층건물에서 보면 고밀한 도시 조직 속에 섬처럼 고립된, 비밀의 숲 같았다. 삼성그룹은 미술관과 대규모 복합시설을 짓고자 했으나 여러 도시계획 관련 법과 규제에 막혀 포기하고 한진그룹에 매각한다. 2008년 2900억원에 땅을 산 한진그룹은 7성급 특급호텔을 지으려 10년 넘게 애쓰며 법정 다툼까지 벌였지만, 결국 2019년 매각 계획을 발표한다. 한진과 서울시가 긴 협상을 벌인 끝에 2021년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우선 매입하고 서울시가 보유한 토지와 교환하는 방식에 합의해 송현동은 마침내 서울시로 넘어오게 된다. 송현동처럼 기구한 사연이 켜켜이 쌓이고 층층이 묻힌 땅도 흔치 않다.

우연처럼 공터의 옷을 입고 귀환한 송현동 공터는 열린 경관의 힘과 매력을 발산하며 서울 도심에 숨통을 틔웠다. 송현동이 열리자 오랫동안 가로막혔던 북촌의 골목들도 서로 연결됐다. 송현동과 이어진 골목을 걷다 보면 국립현대미술관이 나온다. 조금 더 힘을 내면 청와대다. 송현동과 서울공예박물관이 하나가 돼 북적이고, 두 장소 사이 감고당길은 이미 벼룩시장과 거리공연으로 들썩인다. 서울의 그 어느 공원보다 넉넉하고, 그 어떤 광장보다 활기차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 상태 그대로의 송현동은 시한부 경관이다. 2024년 말까지 예정된 임시개방이 끝나면 ‘이건희 기증관’ 신축 공사가 시작된다. 완공은 2027년이다. 미술관에 부지의 3분의 1 정도만 할애하고 미술관을 부분집합으로 품는 문화공원을 조성한다는 게 서울시 계획이지만, 공원이 주연이 되고 건축이 조연이 되는 지혜로운 설계안을 마련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2년 남짓한 임시개방 기간이 도시에 여백의 경관을 남겨둬야 한다는 공론과 시민 합의를 끌어내는 소중한 계기가 될 수 있기를.

한세기 넘는 세월의 풍파를 겪고 홀연히 돌아온 송현동은 역설의 경관이다. 미군의 오랜 주둔이 없었다면 100만평 용산공원 부지는 서울의 여느 곳과 다름없는 아파트 단지가 됐을 것이다. 근현대사의 질곡이 없었다면 송현동도 개발의 욕망에 진작 자리를 내줬을 것이다. 지도에서 삭제된 땅이 운 좋게도 살아남았다. 자본주의 도시의 심장부에 숨겨진 비밀의 땅이 넓은 공터로 열린 역설. 덕분에 우리는 도시에서 비움의 가치를 다시 살피는 행운을 얻게 됐다. 여백의 경관은 미래 세대의 몫이다. 여백이 도시를 살린다.

여백이 도시를 살린다. 사진 배정한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